2022.02 > 문화 >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동물권 인식 부재에서 오는 참사

문화 [2022.02]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동물권 인식 부재에서 오는 참사

글 김지혜(변호사)

 

인권이 무엇이냐? 동물권은 무엇이냐? 필자는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는 변호사이고, 비인간 동물의 권리를 위한 단체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인권의 범위와 동물권의 범위를 설명할 수 없다. 인권이나 동물권이나 최대한의 보장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 최대한이 어디까지냐고 묻는다면 각자의 기준에 따라 다르겠다. 범위를 불문하고 최대한의 인권이, 최대한의 동물권이 보장되는 사회는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 이상인지. 그러나 실상은 인권이든 동물권이든 부당한 침해를 받지 않도록 부지런히 방어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미리 밝힌다.

 

김지혜 변호사(법무법인 정의)는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 PNR의 전문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9살의 강아지와 함께하면서 동물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동물이 모두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며, 동물학대, 실험동물 폐해에 대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동물권 인식 부재에서 오는 참사

 

동물권 인식 부재는 결국 사람의 본질을 침해

 

‘어려운 사람도 많은데 왜, 어려운 사람부터 돕지 않는가?’ 동물권을 위하여 일한다고 하면 흔히 따라붙는 질문이다. 오해가 있다고 말씀드리겠다. 사람의 문제도 해결하고, 동물의 문제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람의 문제를 전부 해결한 뒤에 동물에게 관심을 준다면 영원히 동물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부단히, 능력껏 사람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동물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

 

우리나라의 「동물보호법」은 말 그대로 동물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법이지만 규정의 대부분은 반려동물을 대상으로 한다. 그중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개나 고양이가 논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에 「동물보호법」을 「반려동물보호법」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최근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상업용 동물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낙마 장면 촬영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말의 뒷다리에 와이어를 묶은 후 당겼다. 달리는 말을 강제로 넘어뜨린 것이다. 연기자는 땅에 떨어져 실신하고, 말은 다리가 부러져 죽었다. 익명의 누군가가 그 과정을 촬영한 영상을 제보하여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친숙한 개, 고양이, 그리고 간간이 사육 곰에 머물러 있었던 동물보호의 관심을 상업동물에까지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보호의 대상이 반려동물이든 상업동물이든 사람이 동물에게 부여한 목적이 아니라, 동물 그 자체로 넓어진 느낌을 받았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장면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장면

 

<태종 이방원> 사건에서 말의 죽음에 분노하기에 앞서, 말의 죽음을 불편하고 부당하게 생각한 누군가의 심정은 어땠을지, 헤아려보는 건 어떨까? 그는 위험한 방식으로 낙마 촬영을 진행한 것이 매우 부당하다고 생각해 제보했다. 이 사실을 접한 다른 누군가는 인간으로서 말에게 부끄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말의 안전을 중시하기보다 신체를 침해하는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또 다른 누군가는 동물을 물건처럼 사용했기에 사람의 본질이라는 양심을 침해했다. 여기서 동물에 대한 배려 없는 사용이 결국은 사람의 본질을 침해한다고 하면 과장된 해석일까.

 

동물권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하면 의도와 관계없이 동물학대의 잔인한 영상과 사진을 자주 접한다. 수십 번, 수백 번을 보아도 둔감해지지 않는다. 이번에도 말이 고꾸라지는 장면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탄식이나 안타까움이라기보다 고통에 가깝다. 동물권과 관련된 일을 한다고 더 예민하고, 유난을 떨어서가 아니라 외력에 의한 신체침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기 때문에 그렇다. 기록을 넘기다 얇은 종이에 베이면 살갗이 아물 때까지 아프고, 바느질하다 실수로 바늘에 찔린 손가락은 상처가 보이지도 않지만 아프다. 사람은 이런 하찮은 고통도 괴로운데, 동물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동물학대와 같은 영상을 보면 그 고통이 목 뒤를 훑고 지나간다. 고통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종(異種) 사이에서 몸짓만으로도 전달된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동물권 인식 부재에서 오는 참사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다시 「동물보호법」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동물보호법」은 동물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체계가 발달한 척추동물로 포유류(사실 인간도 포유류의 하나이지 않은가), 조류·파충류·양서류·어류 중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동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핵심은 ‘고통을 느끼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공통점이 여기에 있다. 사견이지만, 인권이든 동물권이든 그 본질의 최소한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보호하는 데 있고, 나아가서는 그 범위를 확장하여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심리적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보장하는 데에 있다.

 

어쨌거나 인간이든 비인간 동물이든 관계없이 신체와 생명에 대한 침해는 금지하는 것이 ‘권리’의 최소한의 보장이라는 데에 사회적인 동의를 이루었다. 이러한 함의가 국내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1978년 10월 15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세계동물권선언」’이 공포되었고, 독일은 이미 1990년 민법에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고 규정하여 동물에게 사람과 물건 사이의 ‘제3의 지위’를 부여하였고 나아가 2002년 6월 21일 세계 최초로 헌법에서 동물보호를 국가의 책무로 규정했다. 우리 법무부가 2021년 7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제98조의 2 제1항으로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조문을 신설하여 비로소 동참했다. 언젠가는 헌법에 동물권이 명시되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혹자는 “헌법이 무슨 힘이 있느냐”고 하겠지만 헌법에 기재된 권리는 국가에 보장할 의무를 부과한다. 비인간 동물도 인간과 같이 민법상의 지위에서 벗어나 헌법상의 지위를 갖기를 희망한다.

 

필자가 어렸던 25~6년 전에도 대하드라마와 사극은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에도 낙마하는 장면이 있었지만, 지금과 같은 여론은 없었다고 기억한다.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먹고 살기에 치중한 때에는 인간의 권리조차 돌보지 못했다. 그리고 국민 생활 수준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기 시작할 무렵에도 동물은 물건이었고, 개는 펫숍에서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입양’하는 ‘반려’동물이 되었는데 지금 ‘개를 샀다’고 하면 이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한가득 이다. 이제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고, 인간이 아닌 동물도 돌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을 방증한다.

 

<태종 이방원> 사건 이후 제작팀은 가이드라인을 마련했다고 발표했는데 스스로 재발방지를 약속하였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대응이지만, 사실 이 사건 전에도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어떠한 동물도 해를 입지 않았습니다》(동물권행동 카라 발행)이 존재했다. 미국의 인도주의협회(American Humane Association)는 더 오래전에 세밀한 제작 가이인권드라인을 발행하였다. 미국의 것이든 우리나라의 것이든 가이드라인을 따른 제작은 않으리라 예상한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동물 대신 모형을 사용하거나,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여야 하는데 비용이 많이 들고 번거로운 작업이며 현실성이 부족해 보일 수 있다. 특히 돈과 시간을 절감해야 하는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기존의 익숙하고 편한 방법, 즉 가성비와 효율성 좋은 방법을 버리자니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편하고 복잡한 방법을 선택해야 하는 행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를 실천하는 움직임은 의미가 있다. 과거에는 ‘애완견을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나 ‘반려견을 입양’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처럼.

 

 

드라마 <태종 이방원> 말 죽음 사고, 동물권 인식 부재에서 오는 참사

 

동물보호는 존중과 배려 및 보호라는 관점에서 인간 자신에게 필요한 것

 

필자는 동물권과 인권의 관계를 이 이상 쓸 수 없다. 그래서 필자가 자주 찾아 읽으며, 가장 좋아하는 「울산지방법원 2019고단3906 판결문」의 일부를 인용해 글을 마무리 짓는 점, 해량해주시기 바란다.

 

“더 나아가 동물학대행위를 방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 가장 미약한 존재에 대한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우리 곁에 살고 있는 개, 고양이 등 반려동물을 우리 사회 공동체의 일원에 포함한다고 가정하면 반려동물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위치에 있는 존재일 것이다. 동물학대행위는 사회에서 가장 지위가 낮은 존재에 대한 혐오 내지 차별적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혐오 내지 차별적 행동을 용인하거나 그 위법성을 낮게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 밖의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혐오 내지 차별적 행동, 폭력적 행동까지도 간과하거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동물에 대한 학대를 막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생명을 가지고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에 대한 존중이라는 관점과 연결되기 때문이고, 더 나아가 단순히 동물을 위해 서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에 대한 존중과 보호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물에 대한 보호와 학대 방지는 단지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에서 가지고 있는 도덕적 의식과 의무감에서 필요한 것을 넘어서서 전체 사회구성원의 존중과 배려 및 보호라는 관점에서 인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다.
「울산지방법원 2019고단3906 판결문」 중.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