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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기 [2022.02] [기후위기 속의 인권] ① 지구가 뜨거울수록 우리는 불평등하다

글 강수돌(고려대 융합경영학부 명예교수)

 

「인권」은 기후위기로 인해 소외당하거나 발생할 인권 침해의 오늘과 내일을 직시하고 경각심을 높이고자 ‘기후위기 속의 인권’ 연재를 기획하였다. 빠른 이해를 돕기 위해 강수돌 교수가 선택한 대중영화를 통해 기후위기 사례를 알아보았다. 「인권」은 독자와 함께 2022년 기후위기와 인권위기를 넘어서는 변화와 대안을 모색하고자 한다.[편집자 주]

 

① 지구가 뜨거울수록 우리는 불평등하다

 

2013년 여름 개봉한 이후, 약 1천만 명 가까운 누적 관객수를 기록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지구의 새로운 빙하기를 배경으로 한다. 온 세상이 눈과 빙하로 뒤덮인 상태에서 마지막 생존자들이 설국열차를 타고 지구를 17년째 돌고 있다. 그런데 이 빙하기는 절대 이유 없이 닥친 것이 아니다.

 

 

실은 그 이전에 지구 온난화가 너무 심해져 더는 동식물과 인간이 쾌적하게 살아가기 어려워져서 과학자들이 지구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특별한 냉매(CW-7) 같은 걸 개발해서 뿌렸는데, 그 인공 냉매를 너무 많이 뿌리는 바람에 지구 전체가 꽁꽁 얼어붙었던 것! 이런 면에서 <설국열차>의 배경은 빙하기보다는 더 심층적으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에 가깝다.

 

그러나 <설국열차>의 문제의식은 단순히 이런 지구과학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열차 속의 인간들, 즉 기후위기의 마지막 생존자들 사이에서조차 사회적 불평등이 고스란히 재현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권’ 개념을 인간답게 살 권리로 정의하고, 이를 담보하는 보편 가치로, 자유·평등·우애·평화·연대·공생 등을 설정한다면, 설국열차 속의 불평등은 기후위기 속 인권 억압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설국열차는 불평등한 계급 질서만 다루지 않고, 하류층의 반란을 통한 ‘권력자 교체’ 문제까지 다룬다. 나아가 과연 하층민들이 상류층처럼 권력을 장악한다고 해서 세상을 제대로 바꿀 수 있느냐는 질문까지 던진다. 이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자연과학적 문제를 넘어 사회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문제까지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설국열차> 속에 나타난 기후위기와 인권의 연관성을 크게 세 측면에서 정리해 보자.

 

 

기후위기에 직면하면서 훼손된 인권

 

첫째, 기후위기 상황 속에서의 사회적 불평등 내지 상중하 계급 질서 문제를 보자. 전술한바, 영화 속의 설국열차는 지구 온난화라는 인류 생존의 위기 앞에서 긴급 최후 방책으로 고안된 인공 냉각제(CW-7)를 과잉 살포한 탓에 새로운 빙하기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이제 26량의 긴 열차는 그 빙하기 지구를 탈출한 최후의 생존자들을 싣고 지구를 1년에 한 바퀴씩 돈다. 그러나 그 탑승객들 역시 평등하지 않다. 열차 맨 앞의 상류층 객실에는 부자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내고 탑승했다. 이들은 스스로 술과 고기, 마약 파티를 즐기면서도 어린 자녀들에게는 고급 교육을 한다. 중간칸들에는 관리자나 감시자들이 타고 있다. 이들은 상류층식 특혜는 못 누리지만 나름 인간다운 생활을 한다. 그들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설국열차에 탑승할 수 있었는데, 열차 시스템의 관리와 통제를 실무적으로 담당하기에 밥값을 톡톡히 한다. 반면, 열차의 맨 뒤 화물칸에는 하류층들이 밀집해 있는데, 이들은 ‘무임’ 승차자들이다. 돈은 없어도 눈치가 빨라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올라탔다. 그러나 이들은 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으로 겨우 끼니만 때우며 열차가 계속 달릴 수 있게 인력 공급이나 부품 역할을 한다. 엔진실 지하 좁고 어두운 곳에서 손으로 기계를 돌리는 아동의 모습이 가장 상징적이다. 관리자인 메이슨 총리에 따르면 관리자들이 머리 내지 “모자”에 해당한다면, 하류층은 발바닥 내지 “신발”에 불과하다. 수직적 위계질서에서 자기 자리를 벗어나면 팔다리가 잘리는 형벌을 받는다. 한편, 돈도 없고 눈치도 없는 99%의 ‘순진무구한’ 이들은 이미 지구 온난화와 빙하기(기후위기)의 희생양이 되어 사라졌다. 즉, 동일한 기후위기 상황에서도 사회경제적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불평등, 나아가 생존자 내부의 불평등이 뚜렷이 재현된다. 이렇게 인류 보편의 자유와 평등, 우애라는 인권의 가치가 기후위기에 직면하면서 더 처절히 훼손된다.

 

 

닫힌 문을 열고 싶은 인권

 

둘째로, 기후위기 생존자들, 그중에서도 하류층의 인권 상황 개선 가능성 문제다. 하층 계급의 지도자인 커티스는 온갖 난관을 무릅쓰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 반란을 일으킨다. 그 계기는 당연히도 인권(인간답게 살 권리)의 결핍이다. 평소에도 비좁고 불결한 화물칸에서 인간다운 삶은커녕 생존조차 힘겹다. 바퀴벌레로 만든 단백질 블록은 맛도 없지만 양도 부족하다. 생활이라기보다 억지 연명이다. 그러면서도 열차 운영에 필요한 인력은 공급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 열차의 앞칸으로 이동하려 하면 무장한 관리자들의 통제를 당한다. 이들에게 자유는 없다. 그런 데다 어느 날 관리자들은 건강검진을 한답시고 마지막칸 승객들을 모두 집합시킨다. 뭔가 긴장되고 두려운 순간, 관리자들은 ‘쓸모’ 있어 보이는 아동들을 강제로 데려간다. 이에 분노한 앤드류는 관리자에게 신발을 던졌다가 팔이 잘리는 고통을 당한다. 이 비인간적이고 억압적인 상황에서 하류층은 마침내 반란을 꾀한다. 용의주도한 커티스가 중심이 되어 맨 앞의 기관차(엔진실)를 점령, 화물칸의 자상한 노인 길리엄을 새 통치자로 세우려는 계획이다. 우여곡절 끝에 엔진실 진입까지 성공하지만 기관차의 설계자이자 절대자인 윌포드로부터 놀라운 진실을 듣는다. 그것은 설국열차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반란’을 어느 정도 허용하고 그 과정에서 상당수 인구를 ‘감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절대자 윌포드가 꼬리칸의 친구 길리엄과 내통해 왔던 것! 이를 알게 된 커티스는 그간 자기가 믿고 의지해 왔던 모든 것에 배신당한 느낌을 받는다. 결국, 커티스가 깨달은 것은 대중 반란을 일으켜 꼬리칸에서 중간칸을 지나 머리칸까지 도달한다고 해도 설국열차라는 계급 시스템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 설사 반란과 혁명이 일어나도 상하 자리만 바뀔 뿐 인권 불평등은 그대로라는 점이다.

 

오히려 해답은 설국열차의 앞문을 열고 들어간 엔진실이 아니라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에 있었다. 그것은 중간층에 속했던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의 통찰이었다. 그래서 그는 외친다. “나는 닫힌 문을 열고 싶다!” 진정으로 인권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주어진 시스템 안에서 앞이나 위를 노릴 일이 아니라, 그 시스템 전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메시지다.

 

 

① 지구가 뜨거울수록 우리는 불평등하다

 

사람과 자연의 공생으로 기후·인권위기 탈출

 

셋째, 여기까지는 기후위기라는 인류 전체에 닥친 재앙을 독립변수로 보고 사회경제 불평등을 매개변수로 보면서 구원 가능성(구원의 불평등)을 종속변수로 보았다. 이제는 이 구도를 거꾸로 돌려 보자. 과연 기후위기라는 인류의 재앙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역사적으로, 그리고 역설적으로, 지구 온난화 및 기후위기라는 재앙은 원시사회, 노예제사회, 봉건제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산물이다. 불과 500년의 자본주의, 그중에서도 지난 100년 사이에 급격히 진행된 것이 기후위기라는 참사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사회경제적 시스템이 독립변수이고 기후위기는 그 필연적 결과일 뿐이다. 그 중간의 매개변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핵심으로 하는 인류의 생활방식이다.

 

그간 우리는 지구의 자원을 너무나 손쉽게, 너무나 생각 없이 사용해 왔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유하며, 더 많이 소비하면 ‘잘 사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았다. 대량생산과 대량유통, 대량소비와 대량폐기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당연시하며 산다. 이 시스템은 이산화탄소·메탄가스·아산화질소·불화탄소·육불화황 등 온실가스를 대량 방출한다. 그러나 지구는 유한한 생태계다. 지구 자원은 결코 무한하지 않다. 지구의 자정 능력도 벗어났다. 갈수록 온난화와 기후위기가 고조된다. 그러나 자본은 무한 이윤을 추구하기에 결코 ‘충분함’의 원리를 알지 못한다. 광고나 유행을 통해 사람들의 욕구마저 조작해, 계속 생산하고 소비하게 만든다. 무한 욕망을 만들어내야 무한 이윤 추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 사이의 비교와 경쟁 역시 무한 욕망을 만든다. 불평등 체제 속에서 사람들은 ‘잘 살기 경쟁’에 동참한다. 사실, 서로 비슷하게 사는 걸 당연시하면 굳이 경쟁할 필요가 없다. 불평등이 심할수록 상류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중·하류층은 한 칸이라도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발버둥 친다. 오직 기득권 쟁탈전만 있을 뿐, 인권 억압이나 기후위기와 같은 반생명적 사태에 대해서는 무감해진다. 그 결과가 현재의 재앙과 위기다.

 

이렇게 돈벌이 위주의 사회경제 체제(자본주의)는 소유의 불평등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 작동 과정에서 불평등이 확대 재생산된다. 말로는 대량생산-대량소비가 지속한다지만, 그 속에서도 불평등과 양극화는 심화하고 상호 경쟁도 심해진다. 이런 삶의 방식을 비판 없이 수백 년 계속한 결과가 마침내 지구 온난화와 기후위기로 나타났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 삶의 방식이 기후위기를 초래함으로써 인류 전반의 인권위기를 낳은 셈이다. 이제 명확해졌다. 지구도 구하고 인권을 구하려면,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를 축으로 하는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을 넘어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공생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권력 교체가 아니라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것이 대안이다. 이 대안을 구체화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토론과 실천에 달렸다.

 

이는 마치 설국열차의 앞문으로 전진하여 기관차와 엔진실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옆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야 비로소 새 삶이 열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의 예리한 관찰처럼, 열차 ‘밖’에서는 (인공 빙하기 이후에도 지속한) 지구 온난화로 인해 눈이 계속 녹아내리며, 지구는 다시 생명이 살 만한 곳으로 변하는 중이다. 특히, 설국열차의 마지막 장면, 즉 열차 폭발 후 최후 생존자인 요나와 티미가 북극곰의 존재를 확인한 것은 ‘희망’의 실마리다. 인류의 인권 상황 아니, 우리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삶의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우리가 ‘아직’ 생존하는 동안 ‘설국열차’를 탈 필요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 ‘설국열차’의 귀한 메시지다.

 

다소 두렵더라도 우리에게는 열차의 ‘옆문’을 열고 나갈 용기가 있는가?

 

강수돌 고려대 명예교수는 기업과 공공부문 노사관계, 이주노동자의 삶과 운동, 일중독과 건강 문제, 중독 시스템 문제 등을 연구했고, 주경야독을 하며 학생과 시민들을 위한 인문학 특강을 하고 있습니다. 《강수돌 교수의 ‘나부터’ 교육혁명》, 《함씨네와 함께 하는 ‘나부터’ 밥상 혁명》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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