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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만난사람 [2016.04] 레인 없는 수영장에 대한 상상, 인권 영화 <4등> 정지우 감독

진행 정윤수 정리 채소라 사진 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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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영화도 제 장기를 살려 '19금'으로 만들어볼까요? 라는 농담으로 시작했죠.”(웃음) 정지우 감독이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와의 유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인권위와 정지우 감독이 함께 만든 인권 영화 <4등>은 일면 파격적이다. <해피엔드>(1999)로 데뷔해 <사랑니>(2005), <모던보이>(2008) 그리고 <은교>(2012)까지 정지우 감독의 대표작은 한국 영화사에 '파격'으로 기록될 만한 멜로 영화들이다.


  4월 13일(목) 개봉하는 정지우 감독의 새로운 인권 영화 <4등>의 주인공은 수영 천재 소년 준호(유재상)다. 준호는 수영을 즐기고 싶지만, 부모님에겐 아이의 즐거움보다는 등수가 더 중요하고, 선생님은 비뚤어진 권위를 세우는 게 더 중요하다. '다 너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자신의 실패와 후회를 아이들에게 보상받고 싶어 하는 어른들. 정지우 감독은 '숨 쉴 수 없는 물속에서 가장 자유로운 소년 준호를 통해, 아이들의 숨통을 막는 우리 사회를 고발한다. . “엄마, 나 1등하면 행복해?”라고 묻는 아이의 얼굴에 어른들의 욕심이 반사된다.



  하지만 '인권'이라는 주제로 보는 이를 무겁게 짓누르는 대신, 웃음과 위트로 어른들의 비뚤어진 욕심을 부각한다. 1등을 위해 레인을 따라 수영하기 보다, 레인을 이리저리 오가며 자유롭게 헤엄치는 준호를 비추는 수중 장면이 물결과 빛, 소년의 아름다운 움직임이 어우러져 오랜 여운을 남긴다. 지금까지 사랑에 관한 어른들의 심연을 스크린에 아름답게 누벼냈던 정지우 감독이 다시 인권, 아이들의 인권에 눈을 돌린 까닭을 들었다.


┃  국가인권위원회와 두 번째 만남


  - 이번에 인권 영화 연출을 제안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왜 내게?'라고 생각하셨나요?

  정말 반갑고 좋았죠. 저는 상업영화 영역에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사람이거든요. 항상 조금 더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어요. 2005년에 만든 인권 영화 <배낭을 멘 소년>을 정말 행복하게 촬영한 기억도 있어서, 어떻게든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죠.


  - 제작 환경은 자유롭지만, 국가 예산으로 제작하는 영화라 제작비가 빠듯하셨을 것 같은데요.

  글쎄요. 영화를 만들기에 충분한 예산인가 라고 물으시면, 그렇다고 답하긴 힘들죠.(웃음) 더구나 영화의 이야기 상 수중 장면이 필요했기 때문에 제작비가 더 빠듯했죠. 하지만 저는 <4등>은 '고예산 독립영화'라고 생각해요. 요즘 영화 제작 환경에서 다른 후배 감독들은 이 정도 규모로 영화를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 여러 스포츠 중에서 왜 수영이라는 소재를 선택하셨나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개인적인 취향이 영향을 미쳤죠. 프랑스 그래픽 노블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의 훌륭한 작품 중에 <염소의 맛>을 본 적이 있어요. 수영장에서 만난 소년 소녀의 이야기인데, 물 속에서 사람들의 표정과 대화를 표현한 장면이 정말 아름다운 거예요. '이런 영상을 찍고 싶다'는 마음을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는데, 스포츠 인권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은 거죠. 그래서 취재를 하다 보니까 한국 사회 어디를 가더라도 똑같은 문제가 나오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 경우도 부모들은 '1등'을 채근하고, 화실에서 체벌도 있고, 잘 봐달라고 돈 찔러주고. 영화 음악을 하는 친구들에게도 불어봤는데 “우리도 입시 레슨 받으면 상황이 똑같아요”라고 하더라고요. 어디에서 한 국자 떠도 똑같은 모양이구나 싶었어요. <4등>은 단지 운동 선수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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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말미에 펼쳐지는 수영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레인이 흐트러지고 한줄기 빛과 이어지면서 쭉 흘러가는 장면이죠. 수영 선수로 산다는 건 혹독한 현실이지만, 수영장은 몸을 담그고 싶은 아름다운 곳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죠. 수영장에 레인이 있으면, 경쟁과 속도만 있을 뿐이니까요.


  - 그 의미를 이렇게 확장시켜도 될까요? 학교가 갑자기 이상적인 공간이 될 수는 없지만, 만약 학교에서 성적으로 1등부터 40등까지 나열하는 레인을 없앤다면 조금 다른 학교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인 거죠.

  맞습니다. 만약 깃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그 깃대를 뽑는다면 목표가 달라지겠죠. 수영장 레인을 따라 걸으면서 직관적으로 느꼈어요. 경쟁의 공간이, 레인을 흐트러뜨리는 순간 다른 공간으로 작동하는 마술 같은 경험이었죠. 그래서 그 장면을 꼭 영화에 넣기로 마음 먹었어요. 빛이라는 조건에 반응하는 공간으로 디자인 해 본 거죠.


  - 그런데 준호는 결국 1등을 해요. 영화 포스터를 보면 '4등 해도 괜찮아'라고 써있는 데 말이죠. 왜 1등을 만드셨어요?

  그런데 순위를 매기는 사회에서 정말 괜찮을까요? 저는 거짓말일 것 같았어요. 4등 해도 괜찮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제 스스로가 못 믿겠어요. 정말 여러 번 검토해서 맺은 결론이에요. 준호가 쓰레기 도구함의 거울을 거쳐서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을 넣었어요. 과연 준호가 체벌과 스파르타식 훈련을 통해서 1등이 된 걸까, 자유로운 수영을 하고 난 뒤 1등이 된 걸까. 그 친구의 얼굴을 보면 실은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는 거죠


┃  딱 현실 만큼 씁쓸한


  - 이 영화의 주제를 담아내는 주인공이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인물이 엄마(이항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엄마의 내면이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불안을 그대로 담아내는 것불안은 제 불안이기도 해요. 제가 그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을 둔 아빠거든요. 표현의 수의 엄마와 똑같아요. 전혀 자유롭지 못하죠,. “구질구질하게 살 거야, 너? 너 인간대접도 안 해주면 어떡할 거야?” 이 말이 우리를 완전히 휩싸고 있잖아요. 내 아이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도 못 받고 살면 어쩌나. 그게 지금 우리 어른 세대의 공포죠.


  - 수영 코치가 아들을 때리는 걸 알면서도, 엄마는 다시 아들을 맡깁니다. 그 장면은 마치 아이들이 당하는 폭력을 극성스런 엄마가 방치하고, 폭력의 책임을 엄마에게 돌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사실 폭력의 주체는 코치고, 그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것 아닌가요?

  개인의 기질적인 폭력도 있겠지만, 저는 폭력적인 환경을 만드는 건 분명히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스포츠 분야에서 최정예 엘리트 코스를 거쳐 국가대표를 했던 사람이 선수 생활 끝나면 일선 학교로 내려와서 '코치'라는 이름의 비정규직이 됩니다. 1년짜리 비정규직. 이 비정규직의 급여는 학교가 일부를 대고, 나머지는 학부모들이 N분의 1로 돈을 걷어서 대요. 이들 입장에선 성적이 잘 나와야만 다음 해에 계약을 갱신할 수 있어요. 학교 폭력을 개선하려면 학부모들이 인건비를 제공하는 비정규직 코치를 없애야 합니다. 이건 국가가 해야 하는 구조적인 문제예요. 이걸 안 하고 폭력 코치만 문제삼고 징벌하는 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거죠.


  - 코치가 한 때 국가대표 엘리트였지만, 밤에 몰래 도박을 하다가 숙소를 무단이탈해서 폭력을 당하죠. 물리적인 폭력 자체는 나쁜 거지만, 그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요? 결국 그의 잘못이잖아요.

  지금 말씀하신 문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은 부분이에요. 코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가대표 소집에 늦었어요. 만약 코치에게 타당성을 주려면, 예를 들어 부모님께서 편찮으셔서 소집에 늦었다고 해보죠. 그런 상황에서도 국가대표 감독이 강력한 체벌을 가해서 코치가 운동선수로서의 기회를 잃었다면? 도박하고 무단이탈하면 '맞을 짓'이고,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늦는 건 '맞지 않을 짓'인가요? 그 논리로 치면, 맞을 짓이 있다는 거니까요. 제가 문제제기 하고 싶었던 부분은 과연 '맞을 짓'이라는 게 있느냐는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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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을 짓은 없다


  - 문제제기가 '폭력이 왜 형성되는가'로 한 번 더 파고 드는군요.

  맞아요. 한 번 잘못했을 때 때리면 나쁜 선생님인가요? 세 번 잘못하면 그때는 때려도 안 나쁜가요? 세 번까지는 진지하게 타일렀는데도 또 잘못하면 그땐 폭력을 가해도 타당한가요? 이것은 끝이 없는 자의적이고 감성적인 판단의 논쟁에 빠지는 거예요.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맞을 짓은 없다'는 겁니다. 그것이 옳은 명제입니다. 만약 서른 살 즈음에 인생의 위기가 왔는데, 누군가 때려서라도 가르쳐줄 사람이 없어서 그때부터 내 인생이 엇나갈까요? 아니죠. 이건 완전히 잘못된 훈육 방식이에요. 스스로 깨달아서 인생의 좋은 방식을 찾아야죠. 폭력이 그걸 찾아줄 수는 없습니다.


  - <4등>을 보면서 정말 공포스러웠던 장면이 하나 있어요. 다른 분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고요. 형이 동생 때리는 장면, 정말 무서웠습니다.

  관객들이 정말 싫어하고, 무서워했죠. 하지만 처음 말씀 드린 대로 아이가 일방적인 희생자고, 아이가 결국 이 어려움을 극복해내는 것으로 그리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폭력의 고리를 끊어야 합니다. 어떤 체벌에 일종의 정당성이 있는 것 같더라도, 만약 정당성이 없는 상황에서 폭력이 재현되면 누가 어떻게 막을까요? 폭력을 경험한 형이 동생을 때리죠. 그럼 그 동생은 다른 약자에게 안 그러겠어요? 저는 진짜 '맞을 짓은 없다' 캠페인을 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요. 체육계와 전혀 상관없는 강 건너 사람이지만, 우리 사회 전반에 필요해요.


  - 관객들이 <4등>을 어떤 관점에서 받아들이면 좋을까요?

간단해요. '맞을 짓은 없다'라는 명제에 동의하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목불인견의 수많은 상황을 견뎌야 합니다. 수많은 목불인견의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을 찾자는 겁니다. 부드럽고 공식적으로 '맞을 짓은 없다'에 동의하자는 겁니다.(웃음)


  <4등>은 한국 사회의 경쟁적인 교육 시스템과 스포츠인권을 한 소년의 인생과 한 가정의 이야기에 녹여냄으로써 모든 관객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정지우 감독은 경쟁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을 놓치지 않으면서, '세상에 맞을 짓은 없다'는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한탄하기보다 '모든 폭력은 부당하다'라는 인권의 가장 기초적인 명제를 잊지 말자고 말을 건넨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문제를 해결하는 첫걸음은 바로 '나의 인권 의식'부터 되짚어보는 것이 아닐까. 정지우 감독은 <4등>을 통해 우리가 함께 바꿀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정윤수 님은 문화평론가, 채소라 님은 맥스무비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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