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돌봄 [통권158호 2025년 5월*6월.05~06] 가족 자원이 아닌 더 많은 사회권이 필요하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와 간담회를 진행했다. 지난 2월27일 통과된 ‘가족돌봄 등 위기아동·청년 지원에 관한 법률안’과 관련한 제안을 하기 위함이었다. 이 법은 아픈 가족이나 친지를 돌보거나 고립은둔 상태에 있는 아동, 청소년, 청년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 아픈 가족이나 친지를 돌보는 청(소)년들은 시간 빈곤에 시달려서, 고립은둔 상태에 놓인 이들은 세상의 벽이 너무 높아서, 기존의 진로탐색이나 일자리 지원이 있더라도 쉽게 참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돌봄청년’ 용어의 문제?
고무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당사자를 부르는 용어가 문제적이라고 여겼다. 영케어러(Young Carer)는 ‘가족돌봄아동’, ‘가족돌봄청년’으로 제도화됐다. 현장에서 조금만 영케어러를 지원하면 안다. 많은 이들이 ‘가족돌봄청년’이라는 호명을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가족돌봄을 해나가야 하는 청년’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는 게 이유였다. 특히나 아픈 가족을 돌볼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돌보는 이들, 독박 돌봄으로 삶이 피폐해지지만 도망칠 곳이 없어서 돌보는 이들은 이 말에 고개를 저었고 손사래를 쳤다. 현장에서 만나는 영케어러들에게 ‘가족돌봄청년’ 지원을 신청해 보자고 지원하면 이런 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저는 ‘가족돌봄청년’ 아닌 거 같아요.
신청 안 할래요. 저는 돌봄 안하고 싶어요.”
“‘가족돌봄청년’들 대단하네요. 저는 그렇게까지 책임감이 있지 않아서 대상자가 아닌 거 같아요.”
이미 그들은 자신의 일상을 휘청거리게 하는 돌봄을 하고 있는데도 그렇게 답했다. ‘가족돌봄청년’ 지원이 가족 돌봄을 더 짊어지게 하려는 게 아니라, 돌봄 부담에서 벗어나라고 만든 것인데도 그랬다. 당사자가 호명이 주는 부담으로 지원을 거부하는 사례는 청년보다 사회적 시선에 더 예민할 수 있는 청소년 지원 현장에서 더 두드러진다.
청소년을 지원하는 현장에서 ‘가족돌봄청소년’이란 용어의 사용을 일체 금한 적도 있다. 아이들에게 낙인감을 줄 수 있다는 이유다. 실무자들은 당사자에게 앞으로 계속 돌봄을 해야 하는 미래를 부여하는 것 같아서 사용하기 부담스럽다고 한다. 또 기초생활수급자를 ‘기생수’라고 줄여 혐오 표현으로 쓰는 것처럼 ‘가족돌봄청소년’이라는 말도 아예 아픈 가족을 돌본다는 사실을 드러내며 따돌림의 근거가 될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들을 봤을 때, 당사자를 부르는 말에 ‘가족돌봄’을 붙이지 않는 편이 더 나아 보였다. 영어권 국가들은 영케어러라고 부르지만, 비영어권 동아시아 국가들 중 일본은 영케어러(ヤンク?ケアラI)라고 그대로 부르고 대만은 ‘젊은 보호자’(年輕照顧者)로 고쳐 부른다. 오히려 한국처럼 ‘가족’이 붙은 게 이례적이다.
시대적 상황과도 맞지 않는다. 한국의 돌봄정책은 ‘돌봄의 사회화’를 기조로 한다. 돌봄의 주체는 가족이 아니라 사회가 됐다. 그럼에도 저 용어는 원어에도 없는 ‘가족’을 붙여서 다시 한번 돌봄의 주체가 가족인 것 같은 뉘앙스를 준다. 또 가족 다양성이 늘어나면서 직계혈족만이 돌보지 않는 경우도 흔해졌다. 돌봄의 범위가 제한적으로 재현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해졌다.
결국 ‘가족돌봄청년’은 당사자에게도, 실무자에게도, 시대적으로도 맞지 않는 번역어다. 우리는 영케어러라는 원어를 쓰거나, 원어에 가깝게 ‘가족’을 뗀 돌봄아동•돌봄청소년•돌봄청년으로 부르자고 제안했다. 보건복지부와 간담회를 준비하며 온라인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도 대다수가 영케어러를 선호했고, 다음으로 돌봄아동•돌봄청소년•돌봄청년을 지지했다.
자립준비청년과 영케어러
“저는 용어 변경은 반대합니다. 실질적인 제도를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용어를 다시 합의하는 건 어렵습니다.”
간담회 도중에 나온 이야기였다. 보건복지부의 공무원인 그는 ‘자립준비청년’이라고 했다. 자립준비청년은 아동복지시설이나 위탁가정 등에서 돌봄을 받다가 만 18세 이후 자립해야 하는 이들이다. 2021년 7월까지 이들은 부르는 말은 ‘보호종료아동’이었다. 법적 성인이 되었으므로 보호가 종료됐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종료’라는 말은 부정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비춰졌다.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 드러내고자 ‘자립준비청년’으로 부르기로 했다. 간담회에 참여한 공무원은 ‘자립준비’라는 말도 부정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왜 자꾸만 미완성의 존재로만 보냐는 게 요지였다. 나는 있는 그대로 나 자신인데, 계속해서 무언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됐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라도 합의된 용어가 제도적 진전을 만들어낸다며, 용어보다 실질적인 제도 확충을 봐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간담회가 끝났다. 하지만 자립준비청년인 그와 영케어러인 내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것은 큰 진전이었다. 아픈 가족이나 친지를 돌보는 게 사회적 불이익이 되는 세상, ‘고아’에 대한 차별과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었다. 행정의 입장에서 정책적 범주를 그어 놓고 호명했기에 우리는 다른 존재처럼 비춰졌지만 어쩌면 같은 전제 위에 서 있는지도 몰랐다. 한국사회에서의 ‘가족’에 내재된 문제 말이다.
사회학자 장경섭은 한국사회의 특징을 ‘가족자유주의’로 요약했다. 본래 자유주의란 개인을 기본 단위로 하지만, 한국사회는 가족이 기본 단위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국가는 빠른 근대화를 이루는 과정에서 개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기보다 가족 안에 자원을 넣어 주고 알아서 분배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니 보편적인 사회권은 자리 잡지 못했고, 생계부양자가 경제 발전의 주체로서 경제적 이익을 분배받을 권리를 갖는 정도의 시민권이 성립됐다. 장경섭은 그러한 권리를 ‘개발 시민권(developmental citizenship)’으로 규정했다.
가족이 이러한 권리와 의무의 기본 단위인 상황에서 가족이 없다면 어떨까? 자립준비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은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중심으로 분배된 모든 자원에서 박탈당했기에 겪는 일이 아닐까? 과거 가족 안에서 알아서 서로 돌보라는 상황이 오늘날 가족 규모가 축소되면서 영케어러 혼자 생계부양과 돌봄을 다 도맡게 된 것은 아닐까? 자립준비청년은 사적 자원이 없어서, 영케어러는 사적 자원이 될 수밖에 없어서 사회에서 배제된다. 보편적 사회권이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한국사회를 보여 주는 결과가 우리가 아닐까?
가족 자원이 아닌 보편적 사회권이 필요
청년을 지원하는 한 실무자에게 청년들과 시사 대화를 하다 보면 많은 이들이 상속세 폐지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 청년들 중 실제로 상속세를 낼 정도로 재산을 증여받을 이들은 얼마나 될까? 실제로는 상위 몇 퍼센트만이 낼 세금이었다.
“나는 이게 부모에게 재산 받는 것 말고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 청년들의 심정을 대변해 준다고 생각해요.”
실무자는 이렇게 말했다. 청년들은 보편적인 사회권이 보장되는 사회보다, 부모의 재산을 증여받고 비트코인이나 주식으로 재산을 증식하는 미래가 더 안전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서글픈 이야기였다. 우리는 정말 사회가 우리의 미래를 안녕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럴 때일수록 우리에게 어떤 사회권이 필요한지 더 많이 상상해야 한다.
다시, ‘가족돌봄청년’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가족을 돌봄의 주체로 여기지 말자는 말은, 가족이 과도하게 돌봄 부담을 짊어지지 않도록 사회가 책임지자는 말이자, 가족이 없더라도 사회 속에서 충분히 돌봄을 받을 수 있게 하자는 말이며, 가족에게 지원받는 것 말고도 청년들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권을 만들어 가자는 말이다. 우리 모두 개인으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을 때 서로를 돌볼 수 있는 힘도 생긴다.
글 | 조기현(작가)
본지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우리 위원회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