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는 시간 [2025.09~10] 일과 사랑, 정년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인턴>
사람들은 언제 자신이 늙었다고 느낄까. 밤을 새고 일해도(혹은 놀아도) 끄떡없던 체력이 예전 같지 않을 때, 유행에 둔감해질 때 혹은 요즘 음악, 요즘 패션, 요즘 개그가 이해되지 않을 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믿고 싶을 때, 매년 돌아오는 건강검진이 두려워질 때, 약병과 병원비가 늘어날 때, 지인의 부고 소식이 잦아질 때, 그리고 이 대답을 끝도 없이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지금의 내 모습을 전지적 시점으로 느낄 때….
흰머리와 주름처럼 명백한 신체적 노화의 징후를 발견할 때보다 더 뜨끔하게 되는 순간은 사실 사회적 노화를 경험할 때다. 나이로 인해 취업의 기회를 제한받거나 사회적 역할이 축소될 때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은 추락하고 노화에 대한 심리적 압박감은 커진다. 사회적 성취감은 그래서 중요하다.
낸시 마이어스 감독의 <인턴>은 로버트 드니로와 앤 해서웨이가 패션 회사의 70대 인턴과 30대 CEO로 만나 슬기로운 회사 생활 혹은 슬기로운 인생 설계를 공유하는 이야기다. 은퇴한 70세의 벤 휘태커(로버트 드니로)는 요가도 하고 요리도 배우고 중국어도 배우고 모아뒀던 항공사 마일리지를 사용해 전 세계를 여행하면서 부지런히 은퇴 이후의 삶을 보낸다. 그럼에도 허전함을 느끼던 차에 온라인 패션 스타트업에서 시니어 인턴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발견한다. 벤은 곧장 자기소개 영상을 만든다. 거기엔 현재의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는 은퇴했고, 아내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짐작하겠지만 제겐 많은 시간이 생겼어요. 처음엔 솔직히 새로웠어요. 학교를 땡땡이 치는 기분이랄까요. 문제는 어디를 다녀오든 집에 돌아오면 ‘갈 데가 없다’는 공허함을 느낀다는 겁니다. 이럴 땐 계속해서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전 7시 15분이면 스타벅스에 갑니다.”
전화번호부 만드는 회사에서 임원까지 지냈으니 어쩌면 벤은 평생을 바쁘게 일에 매진해온 사람이었을 것이다. 묵혀만 두기에는 아까운 경험, 기술, 지혜도 많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몸과 정신은 퍽 건강하다. 그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고, 경험을 나누고 싶고, 인생의 빈 구멍을 채우고 싶다. “음악가들은 은퇴하지 않죠. 더 이상 그들의 마음에 음악이 존재하지 않을 때 멈출 뿐이죠. 제 안에는 아직 음악이 있습니다.” 이런 시니어 인턴 지원자를 누가 뽑지 않을 수 있을까.
경험은 결코 늙지 않아요.
경험은 결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아요.
회사에 출근을 시작한 벤은 30세의 젊은 대표 줄스(앤 해서웨이)의 업무를 지원하게 된다. 줄스는 창업 이후 빠르게 회사를 키워온 성공한 사업가이지만 회사가 성장할수록 제 삶을 돌볼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중이다.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고 어린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부족하기만 하다. 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 진행한 시니어 인턴십 프로그램에도 줄스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70세의 인턴이 회사에 큰 기여를 하리라 생각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이든 성실히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인턴이자 풍부한 인생 경험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벤은 젊은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회사의 분위기를 바꿔 간다. 동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태도, 선을 지키는 조언과 세심한 배려까지 이보다 더 완벽할 순 없다. 그런 벤을 줄스도 서서히 신뢰하고 의지하기 시작한다.
재밌는 건 줄스를 제외하곤 그 누구도 ‘시니어’ 인턴인 벤을 불편해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상사를 어려워하고 나이 많은 후배를 불편해하는, 나이와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들도 있다(참고로 한국판 <인턴>도 제작 준비 중이다). 사실 늙었다는 것이 낡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늙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일 뿐. 생물이건 무생물이건 모든 것은 세월의 흔적을 제 몸에 새기게 마련이다. 벤이 들고 다니는 오래된 가방, 그 안에 담긴 오래된 휴대폰과 계산기와 수첩은 벤의 ‘시대’를 보여주는 소품인 동시에 벤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도구로 기능한다. 그는 영락없는 올드스쿨이다. 하지만 패션과 태도를 포함한 그만의 라이프 스타일은 젊은 동료들이(혹은 젊은 관객들이) 흉내 내기 힘든 귀한 클래식 그 자체다. 벤의 말처럼 “경험은 늙지 않는다”.
내 인생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죠
그래서 난 빨리 그것을 채워넣어야 했습니다.
한편으로 벤은 사기 캐릭터다. (이런 시니어 인턴이 어디 있어?!) 현실에선 도통 찾아볼 수 없는 로맨스 영화의 남자주인공 같달까. 벤은 열린 태도로 인턴으로서의 생활을 즐긴다. 이전의 경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으스대지 않고, 인턴으로서 맡게 된 업무의 중요도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지 않기에 인턴으로서의 업무에 진심을 다한다. 자존감이 높지 않다면 불가능한 태도다. 벤은 자기만의 삶의 철학을 지니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는 지나치게 이상화된 캐릭터다. 영화 속 노인 캐릭터에도 스트레오 타입이 있는데, 괴팍하거나 인자하거나 존재감이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그 때문에 벤과 같은 캐릭터는 신선하다. 영화에서는 물론 현실에서도 만나기 드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현실의 회사 생활과 세대 갈등은 영화보다 복잡하고 팍팍하고 냉혹하지만, 단순히 나이를 이유로 개인의 기회를 박탈하거나 소외시키는 연령주의 혹은 연령차별주의(ageism)에 예쁘게 반기를 드는 영화의 이상적 태도를 이상적이라고 나무랄 수는 없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에 영감을 주는 예술이다.
“프로이트는 말했습니다. ‘사랑과 일, 일과 사랑. 그게 인생의 전부다’ 라고 말이죠.” 벤은 프로이트까지 인용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두 가지를 언급한다. 평생의 숙제 같은 사랑과 일, 일과 사랑! 사회에는 정년의 개념이 존재하지만, 마음속에 음악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다면 나이로 인해 차별받지 않고 일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본지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우리 위원회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