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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2026.5~6] 혐오의 언어, 자유의 경계에서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의 무게

 

독일 엘랑엔 뉘른베르크 대학 이현정 교수에게 ‘일상의 농담처럼 소비되는 말들이 어떻게 특정 집단을 하나의 이미지로 묶고, 배제의 언어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들어보았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 규제 사이에서 미국과 유럽은 어떠한지, 그리고 한국 사회가 서 있는 현재의 좌표는 어디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독일 엘랑엔 뉘른베르크 대학교 공법학부와 인권학대학원에서 헌법과 인권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이현정 비전임교수(Adjunct Faculty), 변호사
독일 엘랑엔 뉘른베르크 대학교 공법학부와 인권학대학원에서 헌법과 인권법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이현정 비전임교수(Adjunct Faculty), 변호사

 

 

Q _ ‘노키즈존’, ‘맘충’, ‘한남충’, ‘틀딱’, ‘영포티’ 같은 표현이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단순한 유행어인지, 아니면 사회적으로 더 깊은 의미를 갖는 현상인지 어떻게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A _ 저는 이런 표현들을 단순한 유행어나 인터넷식 농담으로만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가볍게 던지는 말처럼 보일 수 있지만, 반복되면 특정 집단 전체를 하나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묶어버리는 힘을 갖게 됩니다.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개인으로 보기보다, 어떤 집단의 전형처럼 취급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런 표현이 단지 누군가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계속 반복적으로 사용되면, 특정 집단을 낮춰 보거나 조롱하는 시선이 점차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의 Vejdeland and Others v. Sweden(2012) 사건도 그런 점을 잘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는 동성애자를 비정상적이고 사회적으로 해로운 존재처럼 묘사한 전단이 학교에서 배포되었는데, 유럽인권재판소는 그것이 직접적인 폭력 선동은 아니더라도 특정 집단에 대한 심각한 편견과 경멸을 확산시키는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일상에서 무심코 쓰는 표현들도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혐오표현은 단지 거친 말이나 무례한 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누구를 동등한 시민으로 보고 누구를 쉽게 비웃고 밀어낼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는가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Q _ 이러한 표현들이 특정 세대나 집단에 대한 인식을 형성하고, 나아가 사회적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혐오표현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A _ 특정 세대를 겨냥한 혐오표현이 강하게 나타나는 이유는, 세대 갈등이 오늘날의 불안과 경쟁을 설명하는 가장 손쉬운 서사로 소비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청년 세대는 취업, 주거, 미래에 대한 불안을 크게 느끼고 있고, 중장년 세대 역시 자신들이 일방적으로 비난받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원래 사회구조적으로 보아야 할 문제이지, 어느 한 세대의 성격 문제로 환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는 구조적 설명보다 “저 세대가 문제다”라는 말이 훨씬 더 빠르고 자극적으로 소비됩니다. 그 결과 세대 간의 차이를 이해하고 조정해야 할 문제가, 조롱과 혐오의 언어로 바뀌어버립니다. 저는 이것이 결국 사회적 신뢰를 약화시키고, 서로를 협력의 상대가 아니라 비난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만들어 사회에 갈등을 야기하는 요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Q _ 이러한 혐오표현이 계속 일상적으로 사용된다면, 사회적으로 어떤 변화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는지요? A _ 가장 우려되는 점은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언어가 점차 일상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과도하거나 부적절하다고 여겨졌던 표현도 반복되면, 어느 순간 사회적으로 용인 가능한 말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특정 집단을 비하하거나 조롱하는 언어가 더 이상 문제적 표현으로 인식되지 않고, 오히려 정상적인 의사표현의 일부처럼 기능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는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혐오표현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공적 공간에서 발언하거나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게 되고, 그 결과 사회적 논의와 제도적 참여의 장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이는 특정 집단의 시민적 지위를 약화시키고, 공동체 내부의 상호 존중과 신뢰를 훼손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결국 혐오표현의 일상화는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전제인 동등한 시민적 공존을 약화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단지 불쾌한 언어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통합과 시민적 평등의 조건을 잠식할 수 있는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_ 혐오표현 규제 논의에서는 ‘표현의 자유 침해’ 문제가 자주 제기됩니다. 표현의 자유와 혐오표현 규제 사이에서 어디까지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A _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원칙입니다. 나와 다른 생각, 불편한 말, 심지어 거슬리는 표현까지도 원칙적으로는 표현의 자유 보호범위에서 폭넓게 보호되어야 한다는 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유럽인권재판소도 Handyside v. the United Kingdom(1976) 판결에서, 표현의 자유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거나 불쾌감을 주거나 불안을 야기하는 표현까지도 원칙적으로 보호범위에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이 판결은 민주사회에서 표현의 자유 보장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출발점이 되는 사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표현이 언제나 같은 수준으로 보호되는 것은 아닙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Erbakan v. Turkey(2006) 사건에서, 종교·인종·지역을 가르는 정치인의 연설이 문제 되었을 때 국가가 혐오 선동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정치적 표현에 대한 형사처벌은 매우 신중해야 하고 비례적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다시 말해 유럽인권재판소의 접근은 “표현의 자유냐 규제냐”를 단순히 양자택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해당 표현의 내용과 맥락, 위험성, 그리고 국가가 취한 대응의 강도를 함께 살피는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결국 균형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그 표현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 적대를 정당화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정부 정책이나 사회현상에 대한 거칠고 불편한 비판은 어느 정도 넓게 보호되어야 하지만, 특정 집단 전체를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몰아가며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표현까지 같은 방식으로 표현의 자유로 보호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Q _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기준이 혐오표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사례나 특징적으로 설명해주신다면요? A _ 미국은 일반적으로 혐오표현이라는 이유만으로 표현을 쉽게 제한하지 않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표현 내용이 거칠고 공격적이더라도, 그것만으로 곧바로 금지되지는 않고, 대체로 직접적인 폭력 위협이나 임박한 위법행위 선동처럼 매우 제한된 경우에만 국가의 개입이 정당화됩니다. 쉽게 말해, 표현이 불쾌하거나 모욕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규제의 대상이 되기 어려운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은 미국 연방대법원의 Brandenburg v. Ohio(1969) 판결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사건은 쿠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지도자의 폭력적 발언이 문제 된 사안이었는데, 연방대법원은 단순히 과격하거나 불쾌한 주장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처벌할 수 없고, 그 표현이 임박한 위법행위를 실제로 선동하거나 유발할 의도와 가능성이 있을 때에만 제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미국에서는 혐오적이거나 과격한 표현이라도, 곧바로 현실의 불법행위로 이어질 위험이 분명하지 않으면 폭넓게 보호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R.A.V. v. City of St. Paul(1992) 사건도 자주 언급됩니다. 이 사건에서는 인종·종교 등을 이유로 적개심이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상징행위를 금지한 조례가 문제 되었는데, 연방대법원은 이를 위헌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유는 국가가 어떤 혐오적 표현만 골라서 금지하는 방식은, 표현의 내용이나 관점을 기준으로 한 규제가 될 위험이 크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미국에서는 혐오표현의 해악을 인정하더라도, 국가가 특정한 생각이나 메시지를 선택적으로 금지하기 시작하면 표현의 자유 전체가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매우 강합니다.

정리하면 미국은 혐오표현도 원칙적으로는 표현의 자유의 틀 안에서 넓게 보호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국가의 개입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하는 편입니다. 이 점에서 미국은 혐오표현 자체의 해악보다는, 국가가 표현을 내용별로 선별하여 규제할 위험을 더 크게 경계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혐오의 언어, 자유의 경계에서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의 무게

 

Q _ 반면 유럽은 혐오표현에 대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접근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어떤 역사적·사회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A _ 유럽이 혐오표현에 대해 상대적으로 엄격한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분명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유럽은 나치즘, 반유대주의, 인종주의, 집단학살의 비극을 겪으면서, 혐오와 선동의 언어가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실제 폭력과 배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뼈아프게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표현은 단지 불쾌한 의견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 그리고 사회적 공존의 조건을 해칠 수 있는 행위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 점은 유럽인권재판소의 Garaudy v. France(2003) 결정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 사건은 한 저자가 책을 통해 홀로코스트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거나 축소하는 주장을 펼친 사안이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를 단순한 역사 해석의 차이나 논쟁적 견해로 보지 않았습니다. 홀로코스트처럼 명백히 확립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관용과 반인종주의라는 유럽인권협약의 기본 가치를 정면으로 훼손하는 것으로 보아, 표현의 자유 보호 범위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또 유럽인권재판소의 Norwood v. the United Kingdom(2004) 사건도 이러한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는 영국 극우정당의 지역 조직 책임자가 자신의 집 창문에 “Islam out of Britain – Protect the British People(이슬람은 영국에서 나가라 – 영국인을 보호하라)”이라는 문구의 포스터를 붙였고, 그 포스터에는 이슬람을 상징하는 초승달과 별도 함께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를 단순히 거칠고 자극적인 의견표현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특정 종교집단 전체를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자는 배제의 메시지로 보고, 표현의 자유의 이름으로 보호받기 어렵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차이는 결국 무엇을 더 우선적으로 경계하느냐와 관련이 있습니다. 미국은 국가가 표현 내용을 심사하고 제한하는 과정에서 표현의 자유 자체가 위축될 위험을 특히 크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면 유럽은 혐오적 표현이 특정 집단에 대한 배제와 적대를 퍼뜨리고,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를 동등한 시민으로 대하는 조건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더 중시합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해당 표현이 단순히 불쾌한 말에 그치는지, 아니면 특정 집단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배제의 언어로 작동하는지까지 보다 엄격하게 판단하려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저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유럽으로 하여금 혐오표현을 단순한 “거친 말”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공존과 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협할 수 있는 문제로 보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유럽에서는 혐오표현이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고, 더 나아가 현실의 폭력이나 사회적 배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지까지 함께 고려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조건 금지할 것인가, 무조건 허용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틀을 넘어서야 한다

 

Q _ 미국과 유럽의 기준을 비교할 때, 한국 사회는 현재 어떤 위치에 있다고 보시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A _ 한국 사회는 아직 미국식 모델과 유럽식 모델 사이에서 기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를 매우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온라인 공간과 일상생활에서 혐오와 조롱이 빠르게 확산되는 현실도 함께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사회가 앞으로 “무조건 금지할 것인가, 무조건 허용할 것인가”라는 단순한 틀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표현은 불쾌하더라도 공적 토론의 일부로 보호될 수 있지만, 어떤 표현은 특정 집단에 대한 적대와 배제를 부추기고, 더 나아가 실제 기회의 문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유럽사법재판소(CJEU)의 판례는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Firma Feryn NV (Case C-54/07, 2008) 사건에서는 회사 대표가 공개적으로 “모로코인 출신은 채용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는데, CJEU는 이 말이 단순한 편견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지원 자체를 위축시키는 차별행위가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어 ACCEPT (Case C-81/12, 2013) 사건에서는 동성애자로 알려진 선수는 영입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NH (Case C-507/18, 2020) 사건에서는 동성애자는 로펌에 채용하지 않겠다는 취지의 발언이 문제 되었는데, CJEU는 이 역시 특정 집단의 참여와 접근을 실질적으로 위축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어떤 말은 단지 기분 나쁜 말이 아니라, “당신은 여기 지원하지 말라”, “당신은 여기 환영받지 않는다”는 신호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 사회도 혐오표현 문제를 단순히 감정이 상하는 표현의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로 누군가의 참여와 기회를 좁히는 방향으로 작동하는지까지 함께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해야 표현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차별과 배제를 줄이기 위한 기준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Q _ 유럽인권재판소 판례 중, 혐오표현과 표현의 자유의 경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를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A _ 독자분들이 이해하시기 쉬운 사례로 몇 가지를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먼저 Handyside v. the United Kingdom(1976) 사건은 표현의 자유가 원칙적으로 매우 넓게 보장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판례입니다. 이 사건은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평가된 책의 배포가 문제 된 사안이었는데, 유럽인권재판소는 표현의 자유의 보호범위에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거나 불쾌감을 주는 표현까지도 원칙적으로 포함된다고 보았습니다. 민주사회에서는 다수에게 거슬리는 표현이라고 해서 쉽게 금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주는, 표현의 자유 보호범위 논의의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rbakan v. Turkey(2006) 사건도 중요한 사례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한 정치인이 선거 유세 연설에서 종교·인종·지역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그 사이의 적대감을 자극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고, 그 결과 터키에서 형사처벌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럽인권재판소는 국가가 혐오와 적대를 부추기는 표현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 자체는 인정하였습니다. 다만 정치적 표현에 형사처벌을 가하는 경우에는 특히 신중해야 하며, 그 제재가 실제로 필요한 범위 안에 있고 비례적이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혐오표현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더라도, 국가의 개입 방식까지 언제나 자동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사례는 Jersild v. Denmark(1994)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는 한 기자가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는 청년 집단을 인터뷰 형식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소개하였고, 그 방송 때문에 기자 자신도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유럽인권재판소는, 그 방송의 목적이 혐오를 퍼뜨리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인종차별적 태도와 사회문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내고 공적 논의를 촉진하려는 데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유럽인권재판소는 기자에 대한 처벌이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같은 혐오적 내용이 담겨 있더라도, 그것이 어떤 맥락에서 전달되었고 어떤 목적 아래 사용되었는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반대로 Féret v. Belgium(2009) 사건은 선거운동 과정에서의 혐오표현이 어떻게 평가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이 사건에서는 벨기에 Front National 정당의 대표이자 하원의원으로서 공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던 정치인이 선거 과정에서 이민자와 외국인을 적대적으로 묘사하는 전단과 포스터를 배포하였고, 그 결과 벨기에에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는 정치인의 표현이라고 해서 무조건 넓게 보호되는 것은 아니며, 특히 정치인의 발언은 사회적 파급력이 큰 만큼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과 적대를 조장하는 경우 더 무겁게 볼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판결은 공적 토론을 위한 정치적 발언과, 특정 집단을 배제와 적대의 대상으로 삼는 선동적 정치표현은 분명히 다르게 평가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결국 유럽인권재판소는 표현이 단지 불쾌한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공적 토론에 기여하는지, 아니면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제를 부추기는지를 함께 봅니다. 쉽게 말해 유럽의 기준은 “거친 표현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말이 사회 안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어떤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까지 함께 살피는 데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같은 자극적인 표현이라도, 사회문제를 비판적으로 드러내는 보도, 민주사회에서 보호되어야 할 정치적 비판, 그리고 특정 집단을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선동은 서로 다르게 평가된다는 점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혐오표현은 단순히 ‘불쾌한 말’의 문제가 아니라,
특정 집단을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동등한 시민으로서의 공존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Q _ 향후 우리 사회에서 혐오표현 문제를 다룰 때, 법적 규제뿐 아니라 어떤 접근이 함께 필요하다고 보시는지요? A _ 저는 혐오표현 문제는 법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법은 가장 심각한 경우에 최소한의 기준을 세우는 데 필요하지만, 일상 속 편견과 조롱, 온라인에서 반복되는 비하 표현까지 모두 처벌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교육, 미디어, 플랫폼의 책임, 그리고 피해자 보호 체계가 함께 가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는 어떤 표현이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누군가를 사회 밖으로 밀어내는 언어가 될 수 있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언론과 플랫폼 역시 자극적인 혐오표현을 단순히 소비 가능한 콘텐츠로 다루지 않도록 책임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피해자를 혼자 두지 않는 것입니다. 혐오표현은 종종 “말 한마디 가지고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 축소되기 쉬운데, 실제 당사자에게는 공적 공간에 참여할 용기 자체를 꺾는 매우 심각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담, 신고, 구제 절차가 실질적으로 작동해야 하고, 공공기관도 피해자 보호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혐오의 언어, 자유의 경계에서 우리가 무심코 던진 말의 무게

 

Q _ 마지막으로,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표현을 돌아보고, 보다 존중하는 언어를 선택하기 위해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독자들에 대한 당부말씀). A _ 저는 우선 아주 작은 질문 하나를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지금 하려는 말이 특정 사람이나 집단을 하나의 부정적인 이미지로 묶어버리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질문입니다. 그 한 번의 멈춤만으로도 많은 표현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온라인에서는 짧고 자극적인 표현이 쉽게 퍼지기 때문에, 더더욱 한 번 더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 웃자고 하는 말, 인터넷에서 흔히 쓰는 표현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당신은 여기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신호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의견이 다를 때도 상대의 정체성 자체를 공격하기보다, 그 사람의 구체적인 주장이나 행동을 비판하는 방식으로 말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세대, 성별, 출신, 장애, 성적 지향 같은 정체성을 문제 삼기보다, 실제로 동의하기 어려운 발언이나 행동의 내용을 지적하는 방식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에서 혐오적 표현이 자연스럽게 사용될 때 바로 반박하거나 대응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적어도 웃으며 동조하지 않기, 왜 그런 표현이 문제 될 수 있는지 조용히 짚어주기,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보기 같은 작은 실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상적인 태도가 쌓일 때, 혐오표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도 함께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존중하는 언어를 쓴다는 것은 단지 예절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동등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민주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결국 우리가 어떤 말을 선택하느냐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를 드러냅니다. 서로를 쉽게 낙인찍고 밀어내는 언어보다,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언어를 선택하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글_ 이현정(교수,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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