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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인권감수성 [2026.5~6] “당신은 투표할 능력이 있습니까?”

 

“당신은 투표할 능력이 있습니까?”

 

철퍼덕, 넘어졌다.
그 찰나의 순간, 무릎의 통증보다 창피함이 밀려와 별일 아니라는 듯 얼른 일어나려 했지만 마음대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늘 다니던 길이었고, 버스를 놓칠 것 같아 뛰었는데, 뾰족하게 튀어나온 보도블록은 기막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처럼 작은 모서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 속상해 주변에 하소연하자, “아팠겠다. 잘 보고 다니지 그랬어”, “나이 들면 그렇게 잘 넘어지더라”, “앞으로 더 조심히 다니고…” 와 같은 위로가 돌아왔다. 분명 걱정해서 나온 말인데, 이상하게도 그 뾰족한 보도블록에 패배한 기분이었다. 길바닥을 제대로 못 본 나, 늙어가고 있는 나, 부주의한 나에 대해 자책을 늘어놓고 있을 때, 마침 “그 보도블록이 잘못했구먼!”이라고 말해준 이로부터 깨달았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한마디가 듣고 싶었다는 걸.

 

“당신은 투표할 능력이 있습니까?”

 

차별도 뾰족한 보도블록을 닮았다. 문제의 원인은 그대로 내버려 둔 채, 피해를 본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왜 그 길로 갔는지, 왜 돌아가지 않았는지, 왜 조심하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익숙한 방식으로 질문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불편한 대답은 외면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는 차별을 개인의 문제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원래 다 그런 거야”, “조금 더 노력했어야지”, “너무 예민한 것 같은데”와 같은 반응이 확대되고 반복될수록 차별은 사회적 장벽이 되어 더 단단해진다. 이 장벽은 제도만 바꾼다고 무너지지 않는다. 차별을 개인의 탓으로 치부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 구조가 만들어낸 결과라는 인식이 함께 뒷받침되어야 가능하다.

 

최근 발달장애인 참정권 운동이 그렇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18세 이상 국민이면 선거권이 있다. 그리고, 동법 제157조 제6항은 “시각 또는 신체의 장애로 인하여 자신이 기표할 수 없는 선거인은 그 가족 또는 본인이 지명한 2인을 동반하여 투표를 보조하게 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6월 지방선거도 발달장애인의 투표 보조 지원은 불투명하다. 이미 두 차례 발달장애인 당사자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차별 구제 청구 소송에 승소하여 ‘투표 보조’ 권리가 인정되었지만,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제157조 제6항에 ‘발달장애’라는 단어가 없다는 이유로 각각 항소, 항고1)했기 때문이다. 이건 넘어질 수밖에 없는 길을 그대로 둔 채, “길이 있으니 지나가면 되지 않느냐?”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당신은 투표할 능력이 있습니까?”

 

2, 3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철이 되면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선거인 능력 평가’를 반복해서 치른다.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어도 스스로 투표소에 갈 수 있어야 하고, 안내문과 투표용지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정당·후보자·기호 등을 구분하여 외울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작은 네모 칸에 정확히 도장을 찍을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공직선거법」 제15조에서 “18세 이상 국민이면 선거권을 갖는다”라고 명시했음에도, “당신이 투표할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라”라는 비공식적 요구가 덧붙여진 셈이다.

 

 

차별과 혐오로 입은 아픔과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옅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투표할 능력이 있습니까?”

 

어쩌면 누군가는 “투표하려면 이 정도는 당연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하고 싶어도 구조와 환경 때문에 불가하다면,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국민의 참정권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실현해야 할 책무를 충분히 이행하지 않은 탓이다. 여기에 이들을 향한 혐오표현도 방관해서는 안 된다. “투표용지도 이해 못 하는 OO이 무슨 투표를 하냐”, “선거권이 OOOO 다 있느냐?”와 같은 표현들은 특정 정체성에 대한 편견을 고착시킬 뿐 아니라 차별을 정당한 것처럼 부추기는 위험도 따른다. 타인의 존엄을 훼손하는 표현은 단순히 ‘의사표현의 자유’로만 볼 수 없다. 세계인권선언 제30조에서 “이 선언에 나온 어떤 권리와 자유도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해치는 데 사용될 수 없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듯, 국가는 인권의 가치에 기반하여 사람들을 분리·배제·거부시키는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대응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 검붉었던 무릎은 이제 연한 녹색으로 변했다. 넘어진 순간의 고통도 어느새 희미해졌다. 그러나 차별과 혐오로 입은 아픔과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저절로 옅어지지 않는다. 제때 조치하지 않으면, 그 상처는 몸과 마음 어딘가에 각인되어 삶을 위태롭게 만든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 차별과 혐오를 멈춰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누군가의 삶이 위태로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이제라도 넘어진 사람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기보다, 왜 넘어졌는지, 그 길에는 무엇이 있었는지 함께 살펴본다면 진정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싶다.

 

1) 2025.5.29. 비마이너(https://www.beminor.com/news/articleView.html?idxno=27991)

 

 

글_ 박병은ㅣ모든사람_인권교육연구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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