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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 이야기 [2026.5~6] 우리 사회 인종차별: 더반 선언 25주년과 진화하는 혐오

 

우리 사회 인종차별: 더반 선언 25주년과 진화하는 혐오

 

오늘날 우리나라에 인종차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주요 유엔 인권 조약 중 인종차별철폐협약이 제일 먼저 1965년에 채택되었고, 우리나라도 1978년에 비준한 만큼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법과 제도가 정비되었으니 이를 ‘다 해결된 과제’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의 지표는 여전히 인종차별과 인종혐오가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과 분쟁 속에서 특정 집단이 체계적으로 배제되고,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혐오가 정치적 동력으로 활용되며, 온라인 공간에서의 혐오표현이 과거보다 훨씬 빠르고 넓게 퍼지고 있다. 인종차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더 교묘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변칙적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보는 게 정확할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국제사회는 인종차별을 단순한 개인적 편견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 인식해왔다.

 

그 전환점이 된 것이 바로 25년 전,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세계인종차별철폐회의’다. 당시 채택된 ?더반 선언 및 행동계획(Durban Declaration and Programme of Action, DDPA)?은 인종차별, 외국인 혐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관용에 대응하기 위한 가장 포괄적인 국제적 가이드라인으로 지금까지도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인종차별은 오히려 더 다층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침투해 있다.

 

우리 사회 인종차별: 더반 선언 25주년과 진화하는 혐오

 

더반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인종에 기반한 차별을 하지 말자”는 당위적 선언에 머물지 않았다는 데 있다. 식민주의와 노예제라는 역사가 현대의 불평등을 어떻게 형성했는지 살펴보고, 이를 해소하기 위한 국가적 책임을 명시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인종차별이 한 개인의 도덕적 결함이 아니라, 사회 체제와 역사 속에 뿌리 깊게 박힌 구조적 문제라는 점을 국제사회의 언어로 확립한 것이다.

 

물론 2001년 당시에도 이 논의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식민주의에 대한 보상 문제나 특정 지역의 정치적 갈등이 얽히면서 일부 국가가 회의 도중 퇴장하거나 참여를 거부하는 등 진통을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반 선언은 이후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는 모든 국제적 기준의 토대가 되었으며, 인권 논의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더반 선언이 제시했던 과제들이 얼마나 이행되었는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혐오는 과거보다 나아졌을까. 안타깝게도 최근의 국제 인권 논의를 보면, 인종차별은 오히려 더 다층적이고 추상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침투해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디지털 환경의 확장이다. 혐오표현은 이제 특정 물리적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플랫폼 알고리즘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와 편견을 빠른 속도로 복제한다. 특히 인공지능(AI)은 학습 데이터에 내재된 인종적 편향을 걸러내지 못한 채 이를 객관적 결과인 양 출력하며 새로운 차원의 구조적 차별을 만들어 내고 있다. 안면 인식 기술의 오작동이나 채용 알고리즘에서의 특정 집단 배제 등은 더반 선언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현대판 인종차별’의 단면이다.

 

우리 사회 인종차별: 더반 선언 25주년과 진화하는 혐오

 

이주와 난민 문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세계적인 경제 불황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외국인 혐오 담론은 대중을 선동하는 가장 손쉬운 도구가 된다. 특정 집단을 잠재적 범죄자나 경제적 위협으로 묘사하는 방식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이러한 배제의 논리는 단순한 인식의 문제를 넘어, 한 국가의 입법과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이에 대응하여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들은 인종차별을 단일한 주제로 보지 않고 성별, 종교, 장애, 경제적 조건 등이 결합된 ‘교차적 차별(Intersectionality)’의 관점에서 접근하기 시작했다. 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는 각 국가의 이행 상황을 점검하며, 법적 금지를 넘어 실질적인 삶의 현장에서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차별은 결코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개최된 제61차 유엔 인권이사회(2/23~3/31)에서 개최된 더반 선언 25주년 고위급 패널 토론에서도 인종차별이 사회·제도·디지털 환경에서 점점 더 복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며, 강력한 제도와 포괄적 법체계, 교육, 시민사회 협력이 실질적 평등을 만드는 핵심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 인종차별: 더반 선언 25주년과 진화하는 혐오

 

결국 지금의 인종차별은 과거보다 덜한 문제가 아니라, 포착하기 훨씬 어려워진 ‘고난도 문제’가 되었다. 제도적 차별의 외피를 벗어던진 혐오가 우리 사회의 알고리즘과 정책, 그리고 일상적인 언어 속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반 선언 25주년의 의미는 현대판 인종차별의 재해석에 있다. 인종차별을 금지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모두가 동의하지만, 그 원칙이 현실에서 어떻게 변질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눈은 무뎌졌을지도 모른다. 국제 인권 논의는 완성된 결론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혐오에 맞서 영토를 넓혀가는 과정이다.

 

우리는 여전히 25년 전과 같은 질문을 받고 있다. “인종차별은 끝났는가.” 만약 우리가 이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증거다. 인종차별은 끝난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끝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글_ 백가윤ㅣ국가인권위원회 국제인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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