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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로 보는 인권 [2024.01~02] 평등세상을 향하여 ‘동학농민혁명’

 

동록개와 형평사가 꿈꾸었던

 

평등세상을 향하여 ‘동학농민혁명’

 

연재를 시작하며

 

이번 연재의 큰 제목을 ‘인권의 발견’이라고 전했다. 한국의 현재 인권 상황에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들을 찾아보고 싶어서다. 과거의 인권과 관련한 사건 현장들을 소개하고 싶고, 그때의 사건 전개과정과 결과들이 미친 영향을 찾아보기 위해서다. 지면 자체가 한정되다 보니 깊이 있게 다루지도 못하고, 전문 연구자도 아니니 깊게 다룰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도 욕심을 부려보는 것이다. 고민 끝에 여섯 가지 사건들을 선별했고, 그 의미들을 추적해보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그래서 잡은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사회 인권의 출발점이 되는 ‘동학농민혁명’을 돌아보려고 한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꿈꾸었던 인권세상은 ‘후천개벽’이었다. 서양과는 다른 생명관에 기초한 평등주의를 주장했던 동학은 이후 한국 사회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한국 인권 역사의 출발점이다

 

둘째, 한국전쟁이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한국전쟁은 종결된 전쟁이 아니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뒤에도 여전히 한국 정치와 의식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해석 없이는 그 뒤에 이루어진 극단적인 반공국가에서 이루어진 인권침해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없다. 한국의 인권을 규정한 결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셋째, 우리 사회에서 배제와 격리, 감금 중심의 인권침해 현장이 존속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일제시대에 도입된 시설들이 사회복지시설의 주류를 이루었는데, 이로부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격리, 나아가 혐오와 차별의 문화구조가 형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떨칠 수 없다.

 

넷째, 일제 강점기 시기부터 추구되어왔던 노동자들의 평등을 향한 투쟁을 짚어보면서 왜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노동권이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한다. 노동과 시민이 분리된 채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조차 불순한 것으로 매도되는 비정상적인 구도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살펴보고 싶다.

 

다섯째, 대한민국은 ‘참사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재난참사가 자주 발생했고, 수십 년 전 재난참사나 현재 발생하는 재난참사 유형도 비슷하고, 재난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세월호참사 이후 비로소 재난피해자의 권리, 안전권이 사회적 의제로 주목받고 있다. 세월호참사에서 이태원참사에 이르기까지 우리사회의 변화과정을 추적하고,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를 나누고자 한다.

 

여섯째, 국가인권위원회가 2001년 설립된 이후, 이전의 국가와는 다른 인권체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인권관련 국가기구와 법, 제도들이 등장하고, 지방자치단체들에서도 인권조례들이 만들어진다. 인권침해 주범에서 인권보호 의무를 진 국가로의 전환이 쉽지만은 않다. 전진과 후퇴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지, 국가의 인권호보 의무를 높이기 위한 인권 주체들의 노력은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고 싶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연재를 무사히 마친다면, 우리 사회 인권문제를 역사사회학적으로 접근하는 짧은 시론 정도는 될 것 같다. 본격적인 연구나 논문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36년간 인권운동을 해온 인권활동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한다는 의미 정도로 읽어주시기 바란다. 이 연재에 나오는 내용의 상당 부분은 필자가 펴낸 두 권의 인권현장 답사기(『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될 것이다. 필자의 오랜 고민과 실천이 녹아있는 책이므로 당연히 이 연재에도 이 책들의 문제의식이 연결된다.

 

 

백정 동록개의 꿈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가면 1894년 동학농민군이 설치한 집강소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유일한 집강소다. 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이 집강소는 허물어져 가던 집을 새로 지어서 옛날 모습은 없다. 1882년에 지었던 집인데 이 곳에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자 백정 동록개가 헌정한 집이다. 백정인 동록개는 왜 자신의 집을 동학농민군에 기증했을까? 집강소 마당에는 ‘동록개의 꿈’, ‘평등한 세상’이라고 쓴 장승이 나란히 서 있다. 1894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무장 봉기한 동학농민군은 관군의 반격을 물리치고, 5월31일 전주성을 점령한다. 호남지역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전주성이 반란군이었던 동학농민군에 함락된 것이다. 여기서 전봉준은 전라감사 김학진과 전주화약을 맺고 전주성을 빠져나온 뒤 전라도 53개 지역에 집강소를 설치한다. 집강소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관민 합동의 치안기구이자 민중들의 자치기구로 동학농민군이 추구했던 폐정개혁안(적폐청산안)을 시행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했을 때 사발통문에는 “났어 난리가 났어/ 참 잘 되었지/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는 운율이 있는 글귀가 붙어 있다.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민중들은 난리라도 나서 이 세상이 엎어지기를, 그래서 다른 세상이 들어서기를 열망했다. 당시 민중들이 겪었던 참상은 재야 사학자 황현의 책 『오하기문』에 “살갗을 벗기고 골수를 발라내듯” 했다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정조 임금 사망 이후 조선에선 세도정치가 이어졌고, 관리들의 가렴주구와 횡포에 진절머리를 내던 민중들은 곳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 사대부 집안은 드넓은 평야지대인 호남을 노렸다. 곡창지대인 이곳에서 2년만 현감 자리를 잡으면 평생 먹고 놀 수 있을 만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니 민중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이런 민중들의 염원을 받아 안은 게 동학농민군이었다. 그들이 주장한 폐정개혁안에는 탐관오리와 부호배, 유림과 양반을 응징하는 내용과 함께 “노비문서를 불태울 것”, “칠반천인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의 머리에 쓰는 평양립은 벗어버릴 것”, “청춘과부는 개가할 것”과 같은 획기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 이는 조선의 신분질서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과거의 부채를 모두 무효로 하는 내용과 함께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하게 할 것”이라고 하여 경제적 평등을 향한 지향을 분명히 했다. 이런 면에서 유럽의 인권구상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은 소유권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권체계도 볼 수 있다. 거기서 언급되는 평등은 “법 앞의 평등”이다. 이는 진전된 내용이지만, 다분히 형식적이다. 차별을 낳는 근본 원인에는 눈을 감고, 자본가들의 무한 이윤을 보장하는 방향의 소유권 중심의 자유를 외치다 보니 실질적인 평등과는 거리가 먼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반면 동학농민군은 실질적으로 경제적 평등까지 포괄한 평등주의를 주창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당시 조선 민중들의 염원이 집약된 내용을 핵심적으로 담아낸 종교였다.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존중하는 내용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을 하늘처럼 섬긴다) ‘시천주’(侍天主, 인간 속에 내재하는 한울님을 잘 모신다), ‘인내천’(人乃天)으로 집약되는 사상체계를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니 소홀하게 대할 수 없다. 서로가 소중한 존재이니, 서로가 서로에게 차별없이 존중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양반이든 중인이든 평민이든, 백정과 같은 천인이든 모두가 동학의 기치 아래 모일 수 있었다. 그런 감격스런 세상을 위해서 싸우는 동학농민군이니 백정 동록개는 집강소로 쓰라고 집을 선뜻 기증했던 것 아니겠는가.

 

 

후천의 세상을 향하여

 

그러나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동학농민군의 2차 봉기는 공주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의 잔인한 진압으로 막을 내렸다. 동학농민군은 전남 진도, 장흥까지 쫓겨 내려갔다. 곳곳에서 동학농민군 색출이 일어났고, 끔찍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렇지만, 당장은 갑오개혁에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이 반영되어 조선의 법제도를 바꾸도록 했다. 백정에 대한 형식적인 차별이 철폐된 것도 이때였다. 학살로 막을 내린 다음 동학농민군들은 이후 의병운동으로, 천도교로 재결집된 세력들은 3.1 만세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다. 뿐만 아니라 3.1 운동 이후 전국에서 일어났던 사회운동의 중심에는 천도교가 큰 역할을 해냈다. 여성, 어린이, 청소년 운동, 교육운동에도 이들의 역할은 지대했다. 그러므로 동학은 이 땅에서 근대의 문을 여는 벼락과도 같은 존재였다. 나아가 동학이 꿈꾸었던 너나 없이 차별 없는 후천개벽의 꿈은 한국 인권의 원형질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출처: 진주시청
형평사 제6회 전국대회 포스터. 출처: 진주시청

 

일제 강점기에 동학이 그렸던 평등세상의 지향을 구체적으로 실천한 인권운동단체가 탄생했다. 1923년 진주에서 창립된 조선형평사*가 바로 그것이다. 형평사는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야 우리는 참사람이 되기를 기약함이 주지이라.”로 시작되는 주지문(창립선언문)을 남겼다. 백정들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호적에 ‘도한’(屠漢, 짐승 잡는 사람)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백정의 자식들은 학교에도 갈 수 없었고, 교회에서 한 자리에서 예배를 볼 수도 없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여전히 불가촉천민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런 현실을 타개하여 세상의 모든 차별을 없애는 선봉에 섰던 것이 형평사였다. 1935년 일제의 탄압을 받아서 대동사로 변질되기까지 형평사가 남긴 평등의 실현을 위한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아직 동록개가 꿈꾸었던, 형평사가 꿈꾸었던 평등세상은 오지 않았다.

 

* 조선형평사는 백정의 신분해방을 목적으로 1923년 4월 24일에서 1935년 4월 24일까지 13년간 활동한 단체이다.

 

 

글쓴이 박래군은 인권운동가로 4·16재단 상임이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

 

글 |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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