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3 > 기획 >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읽기 3> 동성결합 불허, 인권협약 위반인가?

기획 [2016.03] <유럽인권재판소 판결 읽기 3> 동성결합 불허, 인권협약 위반인가?

글 박성철 그림 아이완

 

동성결합 불허, 인권협약 위반인가?


이 사건 청구인은 이탈리아에 사는 동성 커플들이었다[Oliari and others v. Italy, App no 18766/11 and 36030/11(ECtHR, 21 July 2015)]. 이탈리아 법제에서는 동성 결혼이나 이와 유사한 다른 형태의 동성 간 결합(가령, 시민결합 civil union)을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동성 커플들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가족법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차별을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럽인권재판소(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 이하 '재판소')에 소를 제기했다.


  청구인들 중에는 이탈리아 법원에 먼저 권리 주장을 한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 법은 명시적으로 동성 결혼을 금지하지 않고 있다. 만일 동성 결혼을 금지한다고 해석된다면 위헌이라고 덧붙였다. 이탈리아 법원은 청구를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법상 동성 결혼은 인정되지 않으며 EU법에 따르더라도 동성 결혼을 허용할 것인지는 각국의 법 질서 내에서 자유로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았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도 청구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탈리아 헌법에서 불가침의 인권, 이를테면 성적 지향에 따라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를 인정한다는 원칙적인 선언은 했다. 그러면서도 '결혼'이라는 고정된 가족제도가 아닌 다른 대안적인 방법으로도 차별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입법자에게 다른 대안을 마련해 입법 공백을 해소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적했지만, 궁극에는 청구인들이 원하는 바를 곧바로 들어주지는 못했다. 이탈리아에서 권리를 구제받지 못한 청구인들은 결국 유럽인권재판소를 찾았다.


┃  청구인, 시민결합과 같은 대안 필요 주장


청구인들은 세계 각국에서 동성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파트너 제도가 마련되는 추세를 언급했다. 왜 이탈리아에서는 그런 변화의 물결을 맞을 수 없느냐며 입을 열었다. 청구인들은 특히 이탈리아 헌법재판소가 동성 커플을 위해 시민결합(civil union)과 같은 대안적 모델을 마련할 의무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청구인들은, 만일 동성 커플들에게 안정적인 법적 결합 제도를 인정하면 전통적 의미에서의 결혼 제도가 훼손될 것이라는 우려를 특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청구인들이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고통받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데 반해,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염려는 막연한 걱정이라고 일갈했다. 청구인들은, 동성 결합을 허용했을 때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사실을 이탈리아 정부가 입증하지 못했다고 보았다. 설령 이탈리아 정부에 입법 재량이 있다고 하더라도 동성 간 모든 형태의 법적 결합을 부인해 대안적인 파트너 제도를 만들지 않을 형성의 자유까지 인정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동성 결합을 허용해도 다른 누군가의 권리와 충돌하면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낳을 일이 없다고 청구일들은 보았다. 예를 들어, 동성 부부의 입양처럼 아동의 권리 혹은 아동 보호라는 다른 존재의 권리와 부딪치는 갈등이 생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동성 결합을 인정한다고 해서 어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며, 전통적인 가족제도에 안 좋은 영향을 준다는 근거 없는 불안만 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청구인들은, 굳이 동성 간에 구속력 있는 결합을 하고 싶으면 서로 사적인 계약을 체결하면 될 것이라는 지적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사적으로 계약을 맺는 일은 가족제도에 비해 법적 효과가 매우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반면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며 힘들어했다. 사적 계약으로는 조세와 같은 국가행정에서 '법에서 보호 되는 가족'이 받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부부에게 일반적으로 보장되는 안정된 권리도 지닐 수 없다고 비판했다. 


  청구인들은 이런 맥락에서 동성 간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입법 공백은 유럽인권협약(The Convention for the Protection of Human Rights and Fundamental Freedoms)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  이탈리아 정부, 사회적 공담대가 무르익어야 가능


피청구인인 이탈리아 정부는 반박했다. 동성 결혼 허용 여부는 각국이 자국의 실정에 따라 입법 형성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영역이라고 강조했다. 입법 여부를 정할 때에는 각 나라가 처한 문화와 시대 현실을 고려하고 공동체가 지니는 보편적 상식을 살피며 도입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주장했다. 동성 결혼은 사회 구성원들이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문화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로서 새로운 형태의 가족 형태를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해 점진적인 논의를 통해 사회적 공감대가 무르익었을 때 비로소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1986년 동성 간 결합에 대한 법안이 처음 논의된 이래 30년 가까이 의회에서 토론 해왔지만, 아직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했다.


  매우 민감하고 복잡한 이슈인 동성 결합 허용 문제에 대해 꾸준히 논의하고 있으며 유럽 여러 나라와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검토를 멈추지 않고 있으므로, 지금 현재 동성 간 결합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비난받을 수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동성 결혼 혹은 그에 준하는 제도가 아직 마련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신중히 토의 중이며 동성애자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여러 제도를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사회적 합의에 이르지 못해 입법이 되지 못한 것을 두고, 유럽인권협약 위반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유럽인권재판소는 이탈리아 정부의 항변을 배척했다. 인권협약 위반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종전 다른 사건에서 재판소는 동성 간 결합을 허용하지 않는 입법 공백이 인권협약에 반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적이 있다. 언뜻 보면 이번에 입장을 바꾼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두 판결의 배경이 다르다. 이전 판결을 할 당시에는 청구인이 제소를 한 이후 동성 결합을 위한 대안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재판하는 동안 '동성결합제도'가 생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소는 청구인이 제소할 시점보다 더 빨리 대안을 마련하지 않은 문제, 다시 말해 재판소에 제소할 시점까지 동성 간 결합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지 않은 쟁점에 대해서만 판단한 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달랐다. 판결할 시점까지 여전히 이탈리아에서는 논의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이 사건에서는 동성 결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법제가 유럽인권협약 위반인지를 정면으로 다루게 되었다.


┃  유럽인권재판소, 작은 합의에 맞는 대안 도입 의무 있어 


  재판소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같은 추상적인 가치를 앞에 내세우면서 동성애자들이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해서 겪는 현실적 고통을 감추고 있다고 보았다. 청구인들의 주장에 대체로 고개를 끄밖에 변하지 않았다면 그 만큼 한 두 발짝 나아간 대안을 마?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남녀의 결혼제도 외에 진전된 대안을 전혀 내놓지 않는 태도는 재량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큰 합의가 이루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에 정당성이 부여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작은 합의가 있다면 그에 걸맞은 대안을 도입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다.   


※ 이탈리아 상원은 2016년 2월25일 동성커플에게도 법적권한을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시민결합'에 관한 법안을 승인했고, 2개월 내에 하원의 승인을 받으면 최종 확정된다.
<편집자주>


 


박성철 님은 변호사로 법무법인 지평에서 일하고 있다.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