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세상 [2016.03] 2월, 나는 불안하다
글 박영희 사진 이강훈

2015년 4월 기준 교육부에 의하면 초·중·고 교사 37만 명 중 기간제 교사는 4만 7000명. 사립학교의 경우 전체 교사의 36%를 차지하는 학교도 있었다. 지난 2월, 전라남도 순천과 광주에서 만난 세 명의 기간제 교사는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밖에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 맞아요, 스페어 타이어
“임용고시를 준비하는데 만만치가 않더군요. 시기도 좋지 않았고요. 하필 시험이 객관식에서 서술형으로 바뀌었지 뭐예요.”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김혜원(가명) 씨는 교사 임용고시 준비 대신 학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자신의 적성에 잘 맞는지, 그것부터 점검한 다음 진로를 결정할 생각이었다.
“제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즐겁고 신이 났다 할까요? 적성 테스트에서 새로운 자신을 발견한 겁니다.”
기회가 찾아온 건 교육대학원을 졸업하던 2012년 3월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수업 중국어 강사로 일하게 된 혜원 씨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학원과 학교는 정말 다르더군요. 학원이 가르치는 데 그쳤다면 학교는 책임감을 안겨주었죠. 난생처음 모성애를 경험하게 되었고, 학생들이 내 자식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로부터 2년 뒤, 순천의 한 중학교로 자리를 옮긴 혜원 씨는 그러나 왠지 모를 찬바람이 느껴졌다. 교직을 갈망하는 열정만 앞설 뿐 정작 기간제 교사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1학기 첫 시험을 준비할 때 정교사(정규 교사)가 시험 문제를 저한테 다 내라지 않겠어요. 마지못해 대답은 했지만 찬바람이 쌩 몰아치더군요. 나와 너만 있고 '우리'가 빠진 것 같은, 학생들을 위해서라도 시험 문제를 함께 준비하면 좋을 텐데 그게 아니더란 말이죠.”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정교사가 임용고시 시험은 잘 봤느냐고 물었을 때 혜원 씨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어떤 학교에서는 정교사가 학생들에게 기간제 교사를 소개하면서 이런 말까지 했다죠. 너희들도 공부 열심히 하지 않으면 저 선생님처럼 된다는. 거기까지 나간 건 아니지만 얄밉긴 했습니다. 학생들이 기간제 교사의 신상을 알았을 때와 모르고 있을 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이란 말이죠. 학생들이 알게 되면 교사 스스로 움츠러들거나 소심해질 수밖에 없고요.”
학생들과 큰 마찰 없이 여름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교장실로 불려간 혜원 씨는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기간제 교사는 방학 기간에도 학교에 나와야 한다기에 처음엔 그런 줄 알았죠. 그런데 동료 교사가 이상한 말을 하지 않겠어요. 교장은 벌써부터 시간외수당을 염두에 둔 나머지 저를 끌어들인 것 같다고요. 그러니까 전 교장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들러리였던 셈입니다. 기간제 교사에게 수당은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란 말이죠.”
겨울방학을 끝으로 계약 기간이 만료되자 혜원 씨는 갑자기 세상이 텅 빈 것 같았다. 10개월이라는 시간이 이토록 허무할 줄 몰랐다.
“허무하고 두렵다는 말의 뜻을 기간제 교사 때 알았지 뭐예요. 방학을 맞은 정교사는 휴식을 취하는데 저는……. 맞아요, 스페어 타이어. 매년 2월만 되면 불안에 떠는. 이번에는 될까 안 될까, 된다면 계약 기간이 얼마나 될까, 6개월? 1년?”
초조한 가운데 혜련 씨는 응시 원서, 자기소개서, 최종학력증명서, 경력증명서 등 서류를 갖춰 학교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6개월이든 1년이든 기간제 교사 지원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지난해는 고흥(군)에서 지내 한시름 놓았지만 올해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계약이 성사될지 어떨지. 결혼도 걱정이고요. 주변에 기간제 교사와 기간제 교사가 만났다가 깨지는 걸 보니 겁부터 나더군요. 서른을 훌쩍 넘긴 나이에 다른 직종을 찾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요. 사는 게 참 불안한 것 같아요.”

┃ 슬픈 졸업식
“사범대학을 졸업하던 2006년에 기간제 교사 지원 원서만 스무 곳에 넣었는데 모두 허탕을 쳤지 뭡니까. 무(無)경력에서 제동이 걸린 겁니다.”
어떻게든 경력증명서를 제대로 갖춰야 한다는 생각에 이형탁(가명) 씨는 계약 기간이 1개월이든 3개월이든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방학 기간에만 열리는 영어교실 강사로 일하다 광주의 모 여고로 가게 됐는데, 그곳에서 재미난 사실을 알게 되었죠. 정교사의 출산이나 육아 휴직, 장기 병가로 발생하는 공백은 뒷전인 채 기간제 교사를 일부러 모집하지 않겠습니까? 주말에도 출근했으니 학부형들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학교도 없었죠. 학교는 학교대로 수당을 안 줘도 되니 남는 장사나 다름없었고요. 사립학교의 경우 학생들의 성적이 상승할수록 그에 따른 발전기금도 쑥쑥 불어나잖습니까. 사육형에 가까운 광주의 모 여고가 바로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로또 방식으로 기간제 교사를 모집해 성과가 좋으면 재계약하고 그렇지 못하면 한해살이로 버리는.”
양육형 교사가 될 것인가, 사육형 교사가 될 것인가. 기간제 교사로 살아남으려면 양자택일 할 수밖에 없었다.
“사립이든 공립이든 먼저는 실력입니다. 내가 맡은 과목에서 흡족한 결과를 안겨줘야만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재계약 때 보니 14명 중 살아남은 기간제 교사는 3명뿐이더군요. “올 1년 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참 두려운 말이죠. 이 말은 곧 당신과의 계약 기간이 종료됐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였으니까요.”
계약 기간이 만료되는 겨울이면 그렇듯 학교에서 거리로 내몰리는 기간제 교사들. 형탁 씨도 그 과정을 거쳐 안착한 곳이 순천의 모 중학교였다.
“더는 떠돌고 싶지 않아 악착같이 일했죠. 정교사들이 꺼리는 방학 기간에도 나와 보충수업을 진도 하지 않았다. 기간일부터 방학선언일까지.' 형탁 씨는 진저리를 쳤다.
“수법이 교활하다 싶었죠. 계약 기간을 상반기ㆍ하반수당이 있길 합니까, 방학 기간에 급여가 나오길 합니까. 담임에 생활지도까지 온갖 고생은 내가 다 하는데도 돈(상여금)은 정교사가 챙겨가는 꼴이잖아요. 한 학교에서 5년째 근무하다 보니 앞이 캄캄하더군요. 임용고시 교사가 많아지면서 학교 분위기가 협력과 소통에서 완장으로 변했다 할까요. 젊은 교사일수록 이타적인 면을 찾아볼 수 없고, 동료 교사들과의 인간관계마저 초등학생 수준에도 못 미치지 뭡니까.”
교단에 첫 임용고시 출신의 교사가 모습을 드러낸 1991년 2월, 반대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임용고시 교사가 많아질수록 학교는 치열한 경쟁 중심으로 변질될 거라는 염려 때문이었다.
“졸업식 때 제일 비참하더군요. 3학년 담임을 맡고도 졸업식에 참석할 수 없으니 이보다 비참한 현실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기간제 교사는 겨울방학과 동시에 무급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발목을 다쳐 깁스를 하고 다닐 때였다. 연가를 내고 싶었지만 형탁 씨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데다 자신은 유급 휴가를 낼 정교사 신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생활비는 매달 나가는데 방학 기간에는 급여조차 없잖습니까. 이 모든 게 학교마다 다른 계약 방식 때문인데, 이거라도 좀 하루속히 통일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한 해만이라도 안정적인 생활을 도모할 수 있도록 말이죠.”
지난해 2월 형탁 씨는 기간제 교사 10년 만에 처음으로 졸업식에 참석했다. 본인이 직접 학교 측에 간청한 일이었다.
“기쁜데 기쁘지가 않고 오히려 슬퍼지더군요. 학생들의 졸업식에마저 이런 식으로 참석해야 한다는 게 말이죠. 가장 보편적인 「인권」 잡지에마저 제 이름조차 떳떳이 밝힐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잖습니까.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 담임을 왜 기간제 교사가 맡아야 하죠
“스물아홉 살에 사범대학(기계교육학과)을 들어갔으니 늦어도 한참 늦었죠. 교직은 2006년 교생실습을 나간 게 인연이라면 인연이었고요.”
중국집 배달원, 단란주점 점원, 건설 현장 잡부 등 최기석 씨의 지난 경력은 화려했다. 그리고 10대 때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기간제 교사도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승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목포로 옮겨갔더니 정신이 번쩍 나더군요. 공립학교인데도 기간제 교사만 13명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요지경, 기석 씨의 눈에는 그렇게 비쳤다. 이걸 과연 학교라고 해야 할지 장삿속이라고 해야 할지, 선뜻 답을 할 수 없었다. 교감과 옥신각신 한바탕 설전이 벌어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담임을 왜 기간제 교사가 맡아야 하는 거죠?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정교사가 맡는 게 가장 이상적이고 정상적인 순서가 아닌가요. 정교사는 교육감이 직접 발령하고, 학교 측과 계약을 맺는 기간제 교사는 수명이 다하면 버려지는 10개월짜리들이 아닙니까. 언제 떠날지 모를.”
못하겠다고 교감에게 맞서자, 교장의 호출로 이어졌다. 하지만 기석 씨의 대답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담임은 물론이고 학생들의 생활지도도 정교사가 맡아야 한다며 배수진을 쳤다.
“법적 근거가 약한 공격을 받을수록 강한 방어가 필요합니다. 내년에도 나를 책임질 수 있느냐, 당신이 만약 그걸 보장해준다면 기꺼이 담임을 맡겠다고 하자 교장도 입을 다물더군요. 못할 말로, 기간제 교사가 정교사 총알받이 하러 들어간 건 아니잖습니까. 나만의 프라이드라는 것도 있고요.”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세 번째 학교에서는 일주일 만에 뛰쳐나온 적도 있다. 학교마다 왜, 학부형들이 불안해하고 학생들마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간제 교사에게 굳이 담임을 못 시켜 안달인지, 기석 씨는 그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사회라도 강매는 부당성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뭐, 있겠습니까. 고학력자일수록 힘들고 궂은일은 하기 싫다는 거겠지요. 학교의 윗선들은 윗선들대로 일이 생겼을 때 재량껏 자를 수 있다는 점에서 기간제 교사를 선호할 것이고요. 너무 비관적인가요? 그렇다면 이런 방법도 있을 수 있겠네요. 학교에 정말 정교사가 부족해 그런다면 담임이든 학생 생활지도든 군말 없이 협력할 용의가 있다는.”
남들보다 일찍 세상 바닥을 기어본 탓이기도 했다. 볼 것 못 볼 것 다 겪고 나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하여 기석 씨는 제대로 된 교사가 되고 싶다는 일념에 임용고시를 붙들었다.
“정교사가 되기로 마음을 정한 데는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미 재계약을 마친 상태에서 학교 홈페이지에 기간제 교사 모집 공고를 내는 건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입니까. 마치 교육청과 학교가 짜고 야바위놀음을 하는 것 같아 어이가 없더군요. 두 기관이 기간제 교사들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지 뭡니까.”
세 번 도전 끝에 임용고시에 합격한 날이었다. '발령'이라는 어감이 낯설면서도 안정감을 주었다.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옷을 갈아입었을 때 가장 먼저 발 벗고 나선 건 학교 안에서만이라도 기간제 교사라는 용어를 없애자는 거였죠. 교사면 교사지, 더 이상 뭐가 필요하죠? 그리고 하나는 3D 업종처럼 낙인찍힌 담임을 기간제 교사에게 강매하듯 떠넘기지 말자는 거였습니다. 교사가 교사를 차별한다면 무슨 염치로 학생들에게 인권의 가치를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늑대가 양의 탈을 쓴, 위선 중 위선이 아닐까요?”
전라북도 익산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기석 씨는 지난해 봄 인터넷 카페를 개설했다. 13명 모집에 90명이 응시할 정도로 기간제 교사 수가 해마다 증가 추세를 보인다는 점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학생들이 기간제 교사를 빗자루로나더군요. 해마다 2월이면 미아처럼 거리를 떠도는 동료 교사들의 얼굴이 겹쳐 해보라고, 울고 싶?사만의 방을 만들어놓았을 뿐입니다. 물론 기간제 교사들과 연대도 할 겁니다. 교사들이 먼저 건강한 정신을 지녀야 학생들도 교사를 믿고 따를 테니까요. 자식을 탓하는 부모 없듯, 교사와 학생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제아무리 썩었더라도 학교는 각자의 실수를 용납해주고 서로를 보듬어주는 공간이 아닙니까.”
박영희 님은 시인·르포작가로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 <만주의 아이들> <보이지 않는 사람들> 등이 있으며, 최근 중국 연변 조선족 교사들의 이야기를 담은 르포집 <두만강 중학교> 여행에세이 <하얼빈 할빈 하르빈>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