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만난사람 [2016.06] 영화 <시선 사이> “같거나 다르거나, 그럼에도 인권”
글 박보미 사진 이강훈

나이도 분위기도 제각각이다. 20대에 막 들어선 청춘의 떨림부터 20대 후반을 보내는 여배우의 성숙, 30대 후반을 지나는 베테랑 연기자의 여유까지.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저마다 주제도 화법도 색다른 <시선 사이>의 세 단편처럼 각 작품의 주역들도 그 개성이 각기 다르다. 다름을 엮는 공통점은 인권과 영화라는 조합에 대한 믿음과 지지다. 자유라는 보편적 권리와 청소년 인권(<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 사회와 개인을 흔드는 의심과 불통(<과대망상자(들)>), 소통 단절의 사회상과 쓸쓸한 고독사(<소주와 아이스크림>)라는 주제를 풋풋하거나 원숙하게 표현해낸 주역 세 팀을 시사회장에서 만났다.

┃ ① 첫걸음, 인권영화 _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 박지수ㆍ박진수ㆍ정예녹
“하하하, 까르르” 웃음이 멈추질 않는다. 스물하나·스물·열아홉, 갓 걸음을 뗀 신인의 설렘이 세 얼굴에 공통적으로 어린다. <시선 사이>의 문을 상큼발랄하게 여는 첫 에피소드 <우리에겐 떡볶이를 먹을 권리가 있다>('우떡권')의 주역 박지수(지수), 박진수(진수), 정예녹(예녹) 이야기다. '우떡권'은 학교 앞 분식점에서 친구들과 떡볶이 먹는 것이 인생의 낙인 서울의 세 여고생과 일과시간 내 교문 폐쇄라는 청천벽력 같은 출입금지령을 내린 학교 사이의 대립을 경쾌한 톤으로 그렸다. 영화 안팎에서 세 사람은 얼핏 비슷한 듯 또 제각기 뚜렷한 특성을 지녔다. 같은 옷, 비슷한 머리 모양으로 아무리 가린다 해도 다른 빛으로 반짝이고 마는 10대 청춘들처럼 말이다.
“교수님(최익환 감독)의 권유로 오디션을 봤는데 덜컥 연기를 하게 돼서, 아직도 얼떨떨해요.”(지수) 지수는 극 중 이름과 실제 이름이 같다. 셋 중에서도 특히 떡볶이에 살고 떡볶이에 죽는 '떡생떡사'이자, 영화 밖에서처럼 씩씩한 대구 사투리로 학교의 조처에 반발하는 전학생이다. 실제 지수는 대학에서 영화 연출을 전공하는 영화학도다. 토끼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 사랑스러운 진수는 대학 입시에 세 번째 도전 중이다. 영화 속 청소년들의 입시 경쟁 부담을 잘 이해한다. '우떡권'은 그에게 기쁨이자 기회다. “저 삼수생이에요 하하. CF에 몇 번 출연한 적은 있는데, 이렇게 인터뷰까지 하는 건 처음이에요. 신기해요.”(진수) 아직 열아홉, 셋 가운데 막내이지만 차분한 말투가 어른스러운 예녹도 영화라는 체험, 인권영화라는 경험이 신기하기는 매한가지다. “비중 있는 역할을 맡고 전주영화제까지 참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막 연기 생활을 시작하는 배우의 떨림을 내비친다.
인권영화라는 첫 발걸음이 무겁지는 않았을까? 진수가 먼저 입을 뗀다. “떡볶이라는 작은 소재에 인권이란 큰 주제를 담은 게 재미있잖아요. 촬영 내내 즐거웠고요.”(진수) 질문한 사람이 머쓱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은 말투다. “학생들은 닫힌 교문 안에, 떡볶이는 그 밖에 있잖아요. 부당한 억압에 대비돼, 떡볶이는 자유를 상징하죠.”(지수) 진수의 말을 이어받은 지수가 살을 붙인다. 아직 10대, '우떡권'의 주인공에 가장 가까운 예녹은 “군것질은 포기할 수 없는 권리”라는 10대의 입장을 작품 해석에 녹였다. “닫힌 교문 때문에 떡볶이를 못 먹는 건, 스트레스 해소 수단을 뺏긴 거죠. 우리에겐 스트레스를 해소할 권리가 있잖아요?”(예녹)
영화를 찍은 뒤 인권에 대한 나름의 정의도 생겼다. “'이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권리”(지수) 또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자유와 평등”(진수)이라는, 평소 입에 잘 담지 않던 말들이다. “꼭 다시
참여하고 싶다”는 소감과 그러니 “반드시 계속돼야 할 프로젝트”라는 바람은 세 사람의 공통된 답변이다. '우떡권'으로 연기 인생을 시작한, 인권영화의 주인공인 동시에 “팬”임을 자처하는 세 사람이다. 소감과 바람도 함박웃음과 함께 싱그럽게 내놓는다.

┃ ② 오래 벼린 균형 감각 _ <과대망상자(들)> 김동완
“너무 오래된 연예인이라 인터뷰가 재미없을 텐데요.” 만나자마자 멋쩍게 말한다. 김동완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이 만면에 가득하다. 1998년 6인조 아이돌 신화로 데뷔한 지 18년, 그에 앞서 1996년 드라마 <스타트>로 연기 생활을 시작해 벌써 배우 데뷔 20년. 소란스러운 연예계 생활을 견딘 비결은 친근한 인상 한편으로 옳은 일은 옳다고, 아닌 일은 아니라고 할 줄 아는 강단을 겸비한 '균형 감각'일 수 있다. 두 번째 에피소드 <과대망상자(들)>(신연식 감독)에 출연한 이후 평소 지닌 개인적, 사회적 '균형 감각'에 대한 고민이 더 커졌다고 한다.
“'균형'이 핵심적인 말 아닌가 싶어요.” 과대망상증에 걸린 우민(김동완)과 그를 과대망상으로 내몬 세상 사이의 불통을 그린 <과대망상자(들)>의 주제에 대한 해석을 묻자 나온 답이다. 정상과 비정상이 임의로 나뉘고, 불통과 오해가 뒤엉키는 세상에서 상호 이해와 소통을 돕는 '균형 감각'의 가치를 전하는 영화라는 설명이다. 그가 강조하는 균형의 의미는 표현의 자유와 표현의 예의를 포괄하는, 관용에 가깝다. 영화 말미 자막으로 등장하는, (볼테르가 말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18세기 프랑스의 관용에 대한 격언이 자신의 신념과 일치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당신의 의견에 반대한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탄압한다면 당신의 편에 서겠다. 완전히 동의해요. 사람으로서의 인권도,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도 그걸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건 '균형'이라고 봐요.”
그는 개인이든 집단이든, 자유롭게 움직이되 방종으로 흐르지 않게 만드는 사회적 약속 또한 규칙과 균형이란 단어로 표현불균형과 혼란이 생겨요. 방종과 자유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나타나고요.” 그는 지난 5월 3일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최대 가해자인 옥시레킷벤키저에 대한 공개 불매운동에 나섰다. 규제의 고삐를 벗어나 방종으로 치달은 자본, 그러한 방종을 방관한 권력에 끝까지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소신에서다. “옥시 전 대표가 구속됐다고 끝난 게 아니에요. 문제를 방관한 모든 이에게 책임을 물어야죠. '오버' 라는 시각도 있겠지만, '오버'라고 여기는 일을 안 해서 큰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요.”
이미지가 자산인 연예인인데, 이른바 '소신 행보'나 인권영화 출연이 부담스럽진 않을까? “두려움은 전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연예인에게는 어떤 이미지든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 나온 자신감이다. 자신감은 그에게 생각과 말의 자유를 줬다. 성소수자가 주인공인 뮤지컬 <헤드윅> 출연 당시 “게이가 전염병도 아니고, 제 아이가 게이로 태어날 수도 있으니 성소수자들의 이야기가 자꾸 언급되길 바란다.”라는 발언을, 지난해 세월호 참사 1주기 무렵 페이스북으로 “유가족과 국민들은 제도적으로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나라를 바라는 것입니다.”라는 목소리를 내놓을 수 있었던 배경이다.
동네 카페에서 마주친 아기가 예뻐서 카메라에 담고 보니 신연식 감독의 딸이었다는 우연에서 시작된 인연이 인권영화 출연으로 이어졌다. 그리 무겁지 않지만 또 마냥 가볍지만도 않은 그가 노 저어가는 연기와 인생이란 항로에 한 번 더 '균형'을 맞춰줄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다.

┃ ③ 인권영화라는 터닝 포인트 _ <소주와 아이스크림> 박주희
“정의(Justice) 없는 인권은 허세에 불과해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던 박주희가 인권이란 단어 앞에서 말투를 단호히 가다듬는다. 요사이 다시금 대두되는 여성혐오에 대해 특히 강한 문제의식을 내비치며 “정의와 함께 가야 빛을 발하는 게 인권”이라고 힘주는 문장이, 얕은 고민에서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소주와 아이스크림'에서 외롭고 고달픈 나날을 꾸리는 보험설계사 세아를 연기했다. <어떤 시선>(2013)의 <얼음강> 이후 두 번째 인권영화 출연이다.
“<얼음강>을 찍을 때는 인권영화가 뭔지 큰 인식이 없었어요. 의미 있는 일을 했다는 건 개봉 이후 관객과의 대화를 다니면서 깨달았죠.” 2009년 즈음부터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한 그에게 <얼음강>은 배우로서의 직업관이 완전히 달라지는 계기가 됐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병역거부자들,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평소에 마주치기 힘든 분을 많이 만났어요. '이런 영화에 출연해줘서, 용기를 내줘서 고맙다'고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계셨고요. 큰 충격을 받았죠. '영화의 영향력에 대해 큰 고민을 안 했구나' 하고요.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그때 이후 그는 “작든 크든 작품마다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하려” 노력한다. “어떤 사람한테는 인생을 바꿔줄 영화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그에게도 고독사라는 주제는 애초 어렵게 다가왔다. “말이 주는 위압감이 있잖아요. 힘든 내용이겠거니, 짐작했죠.” 단어의 의미가 지닌 무거움을 걷어내고 시나리오를 찬찬히 읽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결국엔 사람의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더라고요. 공감이 가서 '울컥'하는 대사가 많았어요.” 그를 가장 '울컥'하게 만든 대사는 뭘까? “나 좀 안아줄래?” 세아의 마지막 말이다. 고독사를 맞은 중년 여성과의 기묘한 만남 후, 연락이 끊긴 채로 살다 만난 언니에게 건넨 외롭고 따뜻한 말 한마디다. “그 말에 영화의 모든 내용이 들어 있어요. 세아의 안쓰러운 일상, 고독한 중년 여인과 만난 일의 의미, 가족과의 단절 같은 거요.”
평소 “자기반성, 자기 객관화, '생각'하면서 살기”를 실천하려 애쓴다는 그의 목표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연기와 인품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평소 인성이 연기에 묻어나거든요. 이성민 선배(배우)를 보면 그 분이 실제로도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신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갈 길이 멀다고 자평하지만, 이미 그는 충분히 '좋은 사람' 같다. 독립영화를 여러 편 찍으며 갖게 된, “동료 스태프들이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도록 내가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강박적일 만큼 한다.”는 말에 담긴 동료애와 연대 의식이 그 증거다.
박보미 님은 <맥스무비>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