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 이야기 [통권158호 2025년 5월*6월.05~06] 아이들이 말할 수 있을 때, 세상은 달라졌다
유엔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다시는 이와 같은 참혹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국제적 공감대 아래 설립되었다.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대량 학살과 무차별 폭격, 고문의 부활, 강제노동 등을 목격한 인류는 인권과 평화, 안보를 위한 첫걸음을 내딛고, 세계인권선언을 채택했다. 이 끔찍한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집단 중 하나가 바로 아동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부모를 잃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이 수백만 명에 달했으며, 먹을 것, 입을 것, 심지어 이름조차 없는 아이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아동의 생존과 보호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높아졌고, 1946년 유니세프(UNICEF)가 설립되었다. 유니세프는 처음에는 전쟁 피해 아동을 지원하는 기구였으나, 이후 국제 아동 권리 논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48년 유엔이 채택한 세계인권선언에도 아동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25조 제2항은 “어머니와 아동은 특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모든 아동은 적서(嫡庶)에 관계없이 동일한 사회적 보호를 누린다”고 명시하며, 부모의 혼인 여부와 무관하게 모든 아동이 차별 없이 보호받아야 함을 선언하고 있다. 또한 제26조 제1항에서는 초등교육의 의무성과 무상성을 규정하고 있으며, 같은 조 제3항에서는 “부모는 자녀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는 우선적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는 오늘날 중요하게 여겨지는 ‘아동의 자기결정권’과는 다소 다른 관점에서 서술된 것으로, 국가가 교육을 독점하고 사상 통제를 시도했던 나치 체제에 대한 반발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인권선언 이후 국제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인권 규범을 발전시켜 왔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권에 대한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국제사회에서 도덕적 규범으로 폭넓게 인정하게 한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나 법적 구속력이 없는 ‘선언’의 형태로 채택되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국제사회는 세계인권선언의 원칙을 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 형태로 구체화하려는 노력을 이어갔다. 그 결과,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지 40여 년이 지난 1989년, 국제사회는 아동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하는 첫 번째 구속력 있는 국제 문서인 「아동권리협약」(Convention on the Rights of the Child, CRC)을 채택하였다. 이 협약은 아동을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았던 기존의 시각에서 나아가, 아동을 독립된 권리의 주체로 인식한 점에서 인권 발전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아동권리협약의 탄생에는 폴란드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막대한 피해를 입은 폴란드에서는 수많은 아동이 목숨을 잃거나 고아가 되었고, 일부는 타국으로 강제 이주되거나 인체 실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참혹한 현실은 전후 폴란드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겼고, 아동의 권리를 국제적으로 보장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폴란드의 저명한 법학자이자 인권 전문가였던 아담 로파트카(Adam Łopatka)는 1978년부터 폴란드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며, 아동 인권을 국제 인권 체계 속에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을 주도했다. 그는 당시까지의 인권 논의에서 아동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며, 아동을 단순한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의견을 표현하고 스스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리의 주체’로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폴란드 정부는 1979년 ‘국제아동의 해(International Year of the Child)’를 계기로 아동권리협약의 초안을 유엔에 공식 제출했다. 이 초안은 이후 유엔인권위원회와 유니세프를 비롯한 여러 국가 및 시민사회단체의 참여와 협의를 거쳐 10년에 걸친 논의 끝에 완성되었다. 마침내 1989년 11월 20일, 유엔 총회는 아동권리협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며 아동 인권 보호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아동권리협약은 아동을 단순한 보호 대상에서 벗어나, 자신의 의견을 가질 수 있으며 그 의견을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규정했다. 이는 아동의 참여권과 표현의 자유를 국제 인권 체계 내에 명확히 정착시킨 중요한 진전이었다. 협약이 채택된 다음 해인 1990년 뉴욕에서 개최된 세계 아동 정상회의(World Summit for Children)에는 71개국 정상들이 모여 아동의 생존, 보호, 발달을 위한 공동 목표를 설정하고, 아동의 권리를 실현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다짐했다. 이 회의는 아동 문제를 글로벌 어젠다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각국의 아동 관련 정책 수립에도 영향을 미쳤다.
아동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더 중요해지면서, 1992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환경개발회의(Earth Summit)에서는 캐나다 출신의 12세 소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가 세계 각국 대표들 앞에서 연설해 주목을 받았다. 그녀는 미래 세대의 일원으로서 환경 파괴에 대한 우려를 직접 전달하며, “나는 미래를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말로 전 세계인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연설은 지금까지도 ‘세번의 침묵(Silence of Severn)’으로 회자되며 아동의 목소리가 국제 무대에서 어떤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 있다.
아동으로서 유엔에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한 또 다른 인물은 파키스탄 출신의 여성 인권 운동가 말랄라 유사프자이(Malala Yousafzai)다. 1997년생인 말랄라는 11세부터 여성 교육의 중요성을 블로그를 통해 알리기 시작했으며, 여성 교육을 금지하려는 탈레반의 위협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굽히지 않았다. 2012년에는 탈레반의 피격으로 중상을 입었으나, 회복 후에도 활동을 이어갔고, 2013년 7월, 유엔 청소년 총회에서 열린 '말랄라의 날(Malala Day)'에 연설자로 나서 모든 아이가 교육받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호소했다. 이 연설은 전 세계에 큰 감동을 주었으며, 그녀는 이듬해인 2014년 역사상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채택된 지 35여 년이 지난 현재 아동권리협약은 9개의 주요 국제인권조약 중 가장 많은 국가가 비준한 조약이다. 193개 중 미국을 제외한 192개 국가가 비준을 완료했으며, 여기에 옵저버인 팔레스타인, 바티칸 공국, 자유연합국가 지위의 니우에, 쿡 제도를 포함하면 총 196개국이 아동권리협약을 비준했다. 미국은 협약에 서명만 하고 비준은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는 국내법과의 충돌 우려와 연방주의 체계의 복잡성 등이 지적된다. 한편, 아동의 무력 충돌 참여에 관한 제1선택의정서, 아동매매·성매매·음란물에 관한 제2선택의정서, 그리고 아동의 개인진정권을 규정한 제3선택의정서가 협약의 부속 문서로 채택되어 있다. 한국은 제1, 2선택의정서는 비준했으나, 제3선택의정서는 아동의 자기결정권 등에 대한 우려로 아직 비준하지 않은 상태다. 2024년은 제3선택의정서 발효 10주년으로, 유엔은 더 많은 국가들이 해당 의정서를 비준할 것을 촉구했다. 현재는 무상 유아교육과 중등교육에 관한 제4선택의정서 초안이 논의 중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미국이 본 협약은 비준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1, 2 선택의정서는 비준했다는 사실이다. 협약을 비준한 국가는 독립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아동권리위원회에 의해 정기적으로 조약의 이행 여부를 심의받게 되는데, 본 협약을 비준하지 않았더라도 제1, 2 선택의정서를 비준한 미국은 아동의 무력충돌과 아동매매, 아동 성매매, 아동 음란물에 대해서는 국제사회의 심의를 받고 있다.
한국 정부는 2019년 아동권리위원회 심의를 받았고 당시 △비차별 △생명권, 생존권, 발달권 △아동에 대한 폭력 △성적 학대 △교육 △소년 사법과 관련하여 시급한 조치를 요청하는 권고를 받았다. 차기 심의 일정은 미정이다.
이제 국제사회는 아동이 단순한 보호 대상이 아닌,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있는 존재임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아동의 목소리가 실제 정책 변화로 이어지고, 그들이 주체가 되어 미래를 만들어 가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앞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세상’이 아닌, ‘아이들과 함께 만드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아이들이 말할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넓혀 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아동 인권의 실현일 것이다.
참고할 자료 아동권리협약 아동 친화 버전
https://www.unicef.org/media/60981/file/convention-rights-child-text-child-friendly-version.pdf
글 | 백가윤(국가인권위원회 국제인권과)
본지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우리 위원회의 의견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