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읽는 시간 [통권158호 2025년 5월*6월.05~06] 소소한 존재가 이끄는 세상 그 가능성은? <미키 17>
미천한 과학 지식을 끌어모아 얘기해 보자면, 봉준호 감독의 <미키 17>에는 꽤나 양자역학적인 면이 있다. 양자는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상태의 에너지 덩어리를 말하는데, 양자의 물리적 특성은 불연속성과 불확실성이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절대적이라 믿었던 인과의 세계 너머 불확실성 속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0일 수도 있고 1일 수도 있는 상태, 그 무엇도 확정적이지 않은 상태의 에너지. 그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봉준호 영화 속 인물들이 그렇다. 봉준호 영화의 주인공들은 대개 미립자처럼 최소 단위의 물리적 존재감을 지녔다. 작고 연약하고 순진하고 엉뚱하고 때로 우스꽝스럽기도 한 소시민. 영웅이 되기엔 이것저것 모자라 보이는 허술함. 바위가 아닌 계란. 하지만 종종 이들은 공고하고 거대한 세계의 질서를 전복한다. <미키 17>은 이처럼 작고 사소한 존재들이 인류의 희망이 되는 이야기를 낙관적으로 풀어낸다. 그것이 진짜 낙관인지 아닌지는 보는 이의 판단에 달렸지만, 확률이 0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기이한 일도 발생할 수 있는 법이다. 영화에서도, 현실에서도.
오염된 지구를 떠나 타 행성으로의 이주가 실행 중인 2054년. 마카롱 사업을 하다 망해 거액의 빚을 진 미키(로버트 패틴슨)는 무자비한 사채업자들의 협박을 피해 우주로 도망친다. 기술과 재주가 없어도 지원 가능한 ‘익스펜더블’로 행성 이주 프로그램에 합류한 미키는 뒤늦게 왜 아무도 이 업무에 지원하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 익스펜더블은 극도로 위험한 일에 투입되거나 인체 유해성 반응을 테스트하는 업무 등을 맡는 일종의 ‘실험실의 쥐’다. 업무 수행 중 사망하면 이전의 기억과 생체 정보를 고스란히 간직한 상태로 다시 프린트된다. 이른바 휴먼 프린팅 기술을 통해 죽고 살기를 반복하며 온갖 위험에 노출되는 것. 미키는 어느덧 열일곱 번째 미키, 미키 17이 되어 니플헤임 행성을 외로이 탐사한다. 이 얼음행성에는 원주민 생명체인 크리퍼들이 존재하는데, 크리퍼들 덕에 위험에서 벗어난 미키 17은 자신과는 또다른 성격을 지닌 미키 18이 새롭게 프린트된 것을 알게 된다. 두 명의 미키가 존재하는 ‘멀티플’의 상황. 이것은 익스펜더블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에 둘 중 한명은 ‘폐기’되어야 한다. 한편 니플헤임 행성 이주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함장 케네스 마셜(마크 러팔로)과 남편 케네스를 조종하는 일파 마셜(토니 콜렛) 부부는 행성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크리퍼들을 몰살하려 한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선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냉소,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심, 좋은 공동체에 대한 고민, 연대와 공존을 희망하는 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원작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빌려온 <미키 17>에서도 기존의 문제의식이 봉준호 감독의 만화적 터치를 거쳐 발현된다. 이를테면 허무맹랑한 미래가 아닌 섬뜩한 현실로 느껴지기까지 하는 휴먼 프린팅 기술의 묘사와 그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들. 인간이 종이처럼 손쉽게 복사될 수 있는 세계에서의 삶과 죽음은 덧없고 처량하고 고단해 보인다. 휴먼 프린팅 기술로 인해 어떤 사람은 산업 현장의 로봇이 되고 실험실의 쥐가 된다(쥐들에게 명복을).
이처럼 위험천만한 일은 미키처럼 가진 것이 몸뚱이 뿐인 사람들의 몫이 되기 쉽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이 하게 만든다는 발상은 섬뜩하다. 더욱 슬픈 사실은 휴먼 프린팅이라는 기술이 자본가들의 죄책감을 덜어준다는 데 있다. 누구도 그의 반복되는 죽음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 익스펜더블은 ‘재생’되는 존재이기에 그 죽음은 애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죽음과 탄생을 반복해서 경험할 수 있는 미키에겐 생의 존엄 역시 허락되지 않는다. 하찮은 존재의 탄생은 죽음만큼이나 하찮게 다뤄진다. 하지만 미키는 사랑의 기쁨과 죽음의 고통을 느낄 줄 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궁금해한다. “죽는 건 어떤 기분이야?” 가장 영웅적이지 않은 존재가 계속해서 프린트되는 것도 흥미롭다. 존엄 없는 생사의 쳇바퀴에 갇히고 싶은 영웅은 없기 때문일까. 여기엔 멀티플의 문제도 얽혀 있다. 멀티플은 휴먼 프린팅을 통해 여러 명의 ‘나’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황을 말한다. 휴먼 프린팅 개발자 앨런 매니코바가 멀티플을 악용해 연쇄 살인을 저지른 후 멀티플은 불법이 된다. 영화에 짧게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휴먼 프린팅의 개발자가 부랑자들을 연쇄살인의 표적으로 삼은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신을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 거리의 부랑자들을 살인하고 다니는 이야기는 케네스 마셜이 우월한 유전자의 번식을 중요한 과제로 여기는 설정과도 연결되면서 유산 계급의 붕괴된 도덕성과 공동체 의식을 보여준다. 백인 기독교 우월주의를 통해 극단적 추종자들을 이끌고, 젊은 여성 대원을 건강한 자궁을 가진 존재로 여기고, ‘위대한’ ‘우월한’ ‘강력한’의 수식어를 즐기는 마셜 부부는 여러모로 현실의 특정 인물들을 연상시킨다. ‘더 위대한 아메리카’라는 구호에 응답한 미국과 나치즘의 부활을 우려하게 하는 우경화된 유럽의 현재를 풍자하는 인물들의 기행과 악행은 코미디로 포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와 구토와 절망감을 불러일으킨다.
모두를 위협하는 마셜 부부와 그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지 않은 미키의 대결. 이 같은 극단적 힘의 불균형은 영화적 카타르시스를 극대화하지만, 미키가 각성해서 영웅으로 거듭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봉준호의 영화니까, 인물들의 본래 성정은 훼손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폭력적 성향의 미키 18은 퇴장하고 미키 17은 순진한 성정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미키가 강력한 독재자를 물리치고 반복되는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미키의 우군은 다름 아닌 크리퍼들이다. 비폭력, 공감, 연대를 생존의 수단으로 삼는 크리퍼들의 지원 덕분에 미키는 파괴의 순환을 끊게 된다. <미키 17>은 비폭력이 폭력을 이기는 이야기, 계란이 바위를 깨부수는 이야기, 기생이 아닌 공생을 모색하는 이야기다. 이러한 낙관을 순진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암울한 시대에 필요한 건 냉소가 아니라 냉소를 냉소하는 것이다. 연약한 존재와 무해한 존재의 만남으로 체제를 전복하는 것 자체가 이미 전복적이다. 세상에 0%의 가능성은 없다.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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