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위가 말하다 [통권158호 2025년 5월*6월.05~06] #3 정년을 넘어: 초고령사회에서 묻는 노인의 노동
“노인이 왜 일을 할까”라는 질문은 단순히 개인의 선택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이 질문은 우리 사회의 인권 감수성을 드러내는 물음이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생활비가 부족해서”, “자녀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서”라는 데 머문다면, 우리는 아직도 노인을 복지의 수혜자이자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권의 관점에서 보면, 노인의 노동은 단순한 생존 수단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권리다. 노인은 원할 때 존엄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하며, 그 노동은 사회로부터 정당하게 존중받아야 한다. 노동은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자기결정의 표현이자, 자립과 사회 참여를 실현하는 권리의 실천이다. 노인의 노동이 권리로 인식되지 못하는 현실은 각종 통계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39.7%로, OECD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은 수준이다. 반면 고령자 고용률은 OECD 평균의 두 배를 웃돈다. 즉, 많은 노인이 일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또 다른 이들은 가난 때문에 일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 노인의 노동은 자율적인 선택이라기보다, 구조적 빈곤에 의해 사실상 강요된 노동으로 내몰리는 경우가 많다.
그 배경에는 제도의 공백이 있다. 현재 국민연금 수급 개시 연령은 65세인 반면, 법정 정년은 60세에 그쳐 대다수 고령자는 퇴직 이후 최소 5년간 소득 없이 버텨야 한다. 이 공백은 단지 개인의 준비 부족이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제도 설계 미비에서 비롯된 구조적 빈곤이며, 명백한 인권의 사각지대다. 이 문제를 개선하고자 국가인권위원회는 2025년 「고용상 연령차별금지 및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상 법정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상향할 것을 정부에 권고하였다. 이 권고는 고용 정책을 넘어, 노인의 생존권과 노동권을 아우르는 인권 정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유엔이 제시한 노인 인권의 핵심 원칙 중 하나는 ‘독립’이다. 노인은 타인의 부양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소득을 창출하며 ‘일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인의 노동은 여전히 자발적 선택이라기보다 생계를 위한 필수에 가깝다. 빈곤, 사회적 단절, 고용 불안정성이 겹쳐지며, 노인의 노동은 자기실현의 공간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노동을 ‘권리’가 아닌 ‘필요’로 환원시키며, 노인의 존엄성과 자율성을 제약한다.
정년 연장에 대해 흔히 제기되는 반론은 “청년 일자리가 줄어든다”,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대 간 고용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경험이 많은 고령 인력을 유연하게 활용하고 세대 간의 역할을 조율한다면, 청년 고용과 고령자 노동이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 모델을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임금피크제의 실효성 강화와 더불어, 고령자를 고용하는 기업에 대한 세제 혜택, 인건비 및 행정 지원 등 정부의 정책적 뒷받침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인은 시혜나 보호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주체이자, 권리를 가진 시민이다. 노인의 노동은 더 이상 복지나 연민의 시선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일할 권리’, ‘존중받을 권리’, ‘자기결정권’을 포괄하는 인권의 문제다. 정년 연장은 단순히 법적 연한을 몇 년 늘리는 차원이 아니다. 그것은 노인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사회적 토대이자,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에서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인지를 보여 주는 시금석이 된다.
초고령사회에서 노인의 노동은 이제 새로운 차원의 질문을 던진다. 단순히 “일자리를 제공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일자리인가”, “어떤 조건과 환경에서 일하는가”, “노인이 노동의 주체로 존중받고 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이른바 ‘임계장(임시계약직노인장)’으로 불리는 고령자 일자리 정책에서 벗어나, 노인의 경험과 전문성을 살릴 수 있는 다층적인 일자리 체계가 마련되어야 한다. 아울러 연령차별, 건강 불평등, 디지털 격차 등 노인의 노동을 가로막는 구조적 장벽들도 함께 해소해 나가야 한다.
지금 우리가 노인의 노동을 대하는 태도는, 언젠가 노인이 될 우리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대접할 것인지에 대한 거울이다. 노인의 일과 노동을 단순한 ‘필요’가 아닌 ‘권리’로 인식하고 존중하는 사회야말로 진정한 인권 사회이며, 누구나 존엄하게 나이 들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다.
글 | 이동우(정책교육국 사회인권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