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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보기 [2025.09~10] #4 정말로 노인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것일까요?

 

『법무사 사무실에 한 치매 노인이 앉아 있다. 옆에 앉은 아들이 건넨 확인서면을 받아든 노인은 그 안에 적힌 “본인은 위 등기의무자와 동일인임을 확인합니다”라는 문구 아래에 도장을 찍고 아들에게 부동산을 증여하는 데에 동의한다는 서면에도 도장을 찍는다.』 이런 사례에서 아들이 사문서위조죄로 고소당한다면 어떤 판결이 있을까?

 

(출처: ChatGPT가 생성한 이미지)
(출처: ChatGPT가 생성한 이미지)

 

 

노인의 증여 결정은 과연
타인의 부당한 간섭이나 심리적 압박 없이
자신의 상황과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이해하고 내린
진정한 의미의 자기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로 노인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것일까요?

 

증여 서류에 도장을 찍은 동일한 행위에 관하여 어떤 사건에서는 무죄가, 어떤 사건에서는 유죄가 선고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은 치매의 정도이며, 법원은 ‘피해자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의사능력이 있는지’를 의학적 진단, 증인의 증언 등을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 법률행위의 복잡성, 치매환자의 사리분별 능력이 수시로 변동될 수 있다는 점 또한 고려되며, 이를 통해 노인이 자발적으로 증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한다. 만약 치매 증세가 없는 노인이 이러한 증여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면? 치매가 있는 노인인 경우에도 의사능력의 정도를 검토하여 유무죄를 판단하기 때문에 치매가 없는 노인의 행위는 더욱 노인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노인의 자기결정권이 실제로 보장되었는지에 관한 의문에 직면하게 된다. 동의를 했다고 보이는 완벽한 외관이 존재하더라도 과연 이것이 진정한 자기결정이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위 사례를 보면 노인에게는 치매가 있었고, 아들이라는 가장 가까운 신뢰 관계 속에서 자신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재산 처분 행위를 했다. 형식적으로는 완벽하게 본인의 결정이며, 노인에게 직접 묻는다 해도 “내가 원해서 준 것이 맞다”고 대답할지 모른다. 여기서 자기결정권의 정의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자기결정권이란 ‘개인이 타인의 부당한 간섭이나 지배 없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형성하고 그에 따라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본질적인 권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노인의 증여 결정은 과연 타인의 부당한 간섭이나 심리적 압박 없이 자신의 상황과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이해하고 내린 진정한 의미의 자기결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이러한 문제 제기는 자칫 노인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제한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노인은 자신의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권리가 있으며 제삼자의 시각에서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결정이라 할지라도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질문의 초점은 노인의 결정의 내용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즉 그 결정이 합리적인지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노인이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결정을 내려졌는지에 관한 과정을 묻는 것이다. 이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릴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간섭 없이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라는 자기결정권의 본질을 보호하려는 문제 의식에 가깝다.

 

정말로 노인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것일까요?외로움과 정서적 결핍을
느끼는 노인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장하여
접근하는 방식은
치명적이다.

 

이러한 법적 판단의 회색지대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영국 등에서는 노인의 경제적 증여 문제에 있어 ‘부당위압(Undue Influence)’이라는 법리를 적극 활용한다. 이는 한쪽 당사자가 다른 쪽의 정신적, 심리적 약점을 이용하여 불공정한 이익을 취하는 상황을 규율하는 개념이다. 즉 명백한 폭력이나 강압, 거짓말 등이 없었더라도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신뢰 관계나 피해자의 의존성을 이용하여 집요하게 설득하고 심리적으로 압박함으로써 동의를 얻어내게 된다면 이는 진정한 자기결정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그 효력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인의 경우 다양한 요인으로 인해 이러한 부당위압에 특히 취약한 경향을 보인다. 우선 노인은 상당한 자산을 보유하는 경우가 많다. 노인들은 평생에 걸쳐 자산을 축적하였고 국가로부터 매달 지원금을 받기도 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치매노인 76만 명(61.6%)이 보유한 자산을 153조로 추계한 결과에 따르더라도 노인 인구가 보유하고 있는 자산이 상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말로 노인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것일까요?

 

가해자는 노인이 모은 재산을 노리고 노인의 약한 부분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나이가 들면 인지 능력이 저하되어 치매가 아니더라도 복잡한 법률 행위나 금융 거래의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노인은 쉽게 속일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또한 신체 기능의 약화로 타인에게 일상생활을 의존하게 되면서 타인에 의해 심리적 지배를 당하기 쉬운 위치에 놓이게 되기도 한다. 혼자 사는 노인은 외부의 감시로부터 차단되기 쉬우며 이는 가해자가 심리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특히 외로움과 정서적 결핍을 느끼는 노인에게 애정과 관심을 가장하여 접근하는 방식은 치명적이다. 가해자는 조작된 친밀감을 무기로 “당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며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고립시키고, “나에게 재산을 맡겨야 안전하다”고 설득해 전 재산을 자발적으로 이전하게 만드는 수법을 사용한다. 즉 겉으로는 완벽한 증여의 형태를 띠는 착취를 하는 것이다.

 

정말로 노인이 자발적으로 증여한 것일까요?

 

이러한 교묘한 착취를 막기 위해 미국 텍사스 주 형법은 노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를 별도 범죄로 규정하며, 처벌 가능한 행위의 예시로 부당위압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미국 플로리다 주는 신뢰 관계에 있는 자가 노인의 자산을 부당하게 취득하는 것을 폭넓게 금지하며, 특히 특정 조건 하에서 노인이 2년 미만으로 알고 지낸 비친족에게 대가 없이 1만 달러 이상을 이전한 경우 착취가 있었다고 법적으로 추정한다. 더 나아가 영국은 친밀한 관계에서 통제를 목적으로 재산을 지속적으로 착취하는 행위를 ‘통제적 또는 강압적 행동’이라는 별도 범죄로 규정하여,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교묘한 경제적 착취까지 처벌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해외 입법례는 우리에게도 기존 사고방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대응 프레임, 즉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이제는 ‘의학적으로 의사결정이 가능한 상태인가’라는 질문을 넘어 ‘해당 결정이 어떠한 부당한 압박이나 조종 없이 평등한 관계 속에서 온전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가’라는 관계적, 과정적 측면에서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다. 최근 법무부가 입법예고한(2025. 2. 7.) 민법 개정안 역시 부당위압 개념을 명시하여, 이러한 신뢰 관계를 악용한 교묘한 경제적 착취를 막을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고 있다.
부당위압 관련 민법 개정안 규정은 자유로운 의사결정 과정 자체가 침해되었는지를 검토하고, 사기·강박에 이르는 행위가 없어 법적으로 구제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피해자에 대한 보호를 제공한다. 즉 겉으로는 자발적인 증여나 계약처럼 보였던 수많은 행위를 민사적으로 무효로 만들어 피해자 구제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법 개정안의 부당위압 개념 도입은 노인에 대한 경제적 착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에 불과하며, 보다 근본적인 대응을 위해서는 노인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존중과 경제적 착취에 대한 정밀한 대응 체계가 함께 마련되어야 한다. 금융기관이 착취를 막는 문지기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할 뿐 아니라 착취의 위험 신호를 감지할 수 있는 체계도 함께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평소와 다른 비정상적인 거액의 현금 인출이 반복되거나, 특정인(자녀, 간병인 등)이 항상 동행하여 노인의 의사표현을 대신하려 하는 행위, 갑자기 새로운 계좌로 모든 자산을 이전하려는 시도 등이 대표적인 위험 신호가 될 수 있다. 아울러 노인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예방적 조치로서 신탁, 후견 등의 제도 활성화 또한 필요하다. 노인의 재산은 방치되는 순간 눈먼 돈이 되어버릴 수 있는 만큼 보다 적극적인 제도 운용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글 | 이연지(인하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임상법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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