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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장면 하나 [2017.05] <나의 사랑, 그리스> 그리스에서 온 질문, 모두들 잘 살고 있습니까?

글 정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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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시작기호 영화 <나의 사랑, 그리스>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보자.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나란히 소파에 앉아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나지막하면서도 심드렁한 하지만 사실은 매우 중대한 가족의 상황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들이 묻는다. “아빠, 우리 집도 경제 위기인거야?” 아빠가 답한다. “그렇지, 나라가 경제 위기니까.” 아들이 다시 되묻는다. “나라 경제가 어려워지면 부모들은 잠을 같이 안 자? 아빠는 왜 매일 (엄마를 두고 혼자) 소파에서 자?” 어린 아들의 물음은 어쩌면 온당해 보인다.

 

나라의 경제가 어려운 것과 엄마 아빠 사이가 소원해지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아들은 묻고 있는 중이다. 영화는 그들 부부 사이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할 의사가 없다. 하지만 회사의 구조조정 분위기 속에서 언제 퇴출될지 모르는 위기감을 느끼는 이 남자 그러니까 이 아빠의 암울한 상황과 절망감과 무력감이 초라하게 망가진 이 부부애 사이에 어떤 식으로라도 연관되어 있을 것이라는 직감을 관객은 피할 수가 없다. 우린 알고 있다. 국가의 경제란과 한 가정의 불화는 필시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국가의 암울한 경제는 무수한 가족의 불화를 낳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의 삶과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어린 소년도 훗날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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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그리스>는 국내외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는 그리스를 무대로 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망으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과 사회의 어떤 운명적 지도를 펼쳐낸다. 그 안에서 생겨나는 인권의 묵살과 복권에 대해서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 그러기 위해 세 커플의 일화가 차례대로 등장한다. 첫 번째 일화의 제목은 부메랑이다. 그리스 여인 다프네와 시리아 남자 파리스의 사랑 이야기다. 어느 날 심야에 집으로 가던 중 폭행 위기에 놓였던 다프네를 파리스가 구해주면서 둘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시리아 난민이자 불법 이민자로 잠시 그리스에 머물고 있는 파리스의 처지가 문제가 된다. 그들에게는 이내 불행이 닥치게 된다. 두 번째 일화의 제목은 로세프트 50mg”이다. 로세프트는 지오르고라는 남자가 복용하는 우울증 치료제다. 그는 구조조정 위기에 몰린 회사의 직원이다(그러니까 이 사람이 바로 어린 아들에게 질문 받았던 그 아빠다). 월급을 받는다 해도 가스비, 전기세, 의료보험료 등등을 내고 나면 남는 게 없다고 그는 한숨을 짓는다. 경제적 압박이 심해진 나머지 그는 우울증 치료제를 먹는 중이다. 그 즈음 지오르고는 술집에서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스웨덴에서 온 엘리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 뒤 둘의 감정은 깊어진다. 하지만 엘리제는 지오르고 회사의 구조조정 책임자로서 본사에서 온 사람이다. 엘리제와 지오르고의 관계는 복잡해진다. 세 번째 일화의 제목은 두 번째 기회. 독일에서 온 노년의 역사학자 세바스찬과 노년의 평범한 그리스 가정주부인 마리아의 사랑 이야기다. 두 사람은 어느 슈퍼마켓 앞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이후 서서히 사랑을 키워가지만 현실의 벽이 너무 높다. 세바스찬은 마리아에게 인생의 두 번째 기회를 자신과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마리아는 고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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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각 일화마다 주목하고 기억할 만한 장면들이 한두 가지 씩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첫 번째 일화 부메랑에서는 이런 대화가 우리를 멈춰 세운다. 파리스가 시리아에서 그림을 공부한 미술학도였다는 점, 다프네가 그리스에서 정치학을 공부하는 정치학도라는 점이 밝혀진 직후다.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간다. 파리스가 말한다. “우리나라는 많이 힘든 상황이에요그러자 다프네가 답한다. “알아요, 하지만 우리나라도 힘든 상황이에요.” 그러자 다시 파리스가 말한다. “에이당신 나라가 훨씬 나아요. 여기는 같은 나라, 같은 사람끼리 벌이는 전쟁이 없잖아요.” 동시대 그리스인과 시리아인의 대화, 불행한 곳에서 사는 사람(다프네)과 불행한 곳으로 온 더 불행한 사람(파리스)의 대화는 쓸쓸하기만 하다. 특히나 파리스는 그리스에서 더 이상 온전한 미술학도가 아니라 그저 인권을 잃어버리고 체류하는 무명의 난민일 뿐이다. 그리스의 심각한 경제 위기와 맞물리면서 어떤 난민들은 잠재적 범죄자가 되기도 하고 더러 그들을 몰아내겠다는 명목으로 어떤 그리스인들은 자경단원이자 파시스트가 되기도 하는데, 마침내 파리스와 다프네의 관계는 그런 복잡한 정세 속에서 불행의 늪으로 끌려들어가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목했던 저 어린 소년의 질문은 여기서도 다른 방식으로 되돌아온다. 나라 경제가 안 좋아지면 사랑하는 젊은 남녀는 꼭 헤어져야 하는 건가요, 라고 말이다.

 

두 번째 일화의 주인공들인 스웨덴 사람 엘리제와 그리스 사람 지오르고 사이에서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등장한다. 강인한 여성 엘리제, 그리고 복지국가 스웨덴에서 온 이 여인은 우울증 약이나 먹고 있는 그리스 남자 지오르고에게 핀잔을 준다. 하지만 지오르고의 항변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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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봐요. 한밤중에 당신이 방에서 잘 자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와서 당신을 붙잡더니 바닥에 던지곤 발로 차는 거예요. 당신의 비명과 함께 모든 삶이 사라지죠. 평생 이뤄온 것들이 없어져요. 모두 당신 잘못이 돼서. 전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되고요. 내가 이 나라에서 매일 겪는 현실이에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그러자 엘리제가 반격한다. “그 침입자 말이죠. 집에 어떻게 들어온 거지요? 문 잠그는 것을 잊은 건 아닌가요? 칠칠치 못해서 그냥 열어둔 건 아닌가요? 당사자한테도 잘못은 있는 거겠지요. 우린 자유로운 세상에 살아요.” 그러자 지오르고의 외마디.

 

정말 자유로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세계 인구의 3분의 2는 고통 받고 있어요.”

 

지오르고 역시 그 3분의 2에 들어가는 인물이다. 지오르고는 구조조정 당할 위기에 처한 친구가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를 외면했고 친구는 자살했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도 구조조정 당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니까 질문은 다시 돌아온다. 나라가 경제 위기에 빠지면 사람들은 전부 우울증 약을 먹는 건가요, 라고 저 어린 아들은 어디선가 아빠에게 또 질문했을지 모를 일인 것이다. 하지만 경제 위기와 우울증 약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다. 하지만 세 번째 일화에 이르러 영화는 한 가지 희망을 제시한다. 독일인 역사학자 세바스찬과 그리스인 주부 마리아의 사랑을 통해서다. 이들의 첫 만남은 평범한 것 같지만 특별하다. 슈퍼마켓 버스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마리아. 그녀에게 세바스찬이 도움을 청한다. 허리를 다쳐서 굽힐 수 없어 그러는데 저기 바닥에 떨어진 내 식료품 봉지를 좀 주워줄 수 없느냐는 것이다. 떨어진 물건들을 주섬주섬 주우며 마리아는 은근히 부아를 참지 못한다. 그래서 속사포처럼 불평을 쏟아낸다. 요지는 이렇다. 당신은 비싼 걸 많이도 샀다, 나는 돈이 없어 고작해야 이것 밖에 못 샀는데. 당신이 산 그 토마토도 나는 돈이 없어 못 샀다. 그녀는 그리스어로 말했으므로 독일인 세바스찬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녀가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은 안다. 결국 경제적 차이가 그녀를 화나게 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된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났을 때 세바스찬은 토마토 상자에 리본을 묶어 그녀에게 선물한다. 둘은 이제 호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한다. , 그러니 질문은 이제 긍정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작은 토마토 상자 하나가 나라의 경제 위기 때문에 불행해진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인가. 이 영화는 그렇다고 믿는다. 때론 토마토가 사람을 구하고 인권을 높인다.

 

세 번째 일화에는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장면도 있다. 세바스찬이 마리아의 소원을 들어주는 장면이다. 마리아의 소원은 사실 간단하다. 한밤중 폐장한 슈퍼마켓 안을 마음껏 활보해 보는 것, 그게 마리아의 소원이다. 세바스찬은 그걸 간단하게 실현시켜 준다. 수퍼마켓의 야간 경비원에게 돈 몇 푼을 쥐어 준 다음 그날 밤 마리아와 함께 수퍼마켓 안으로 들어간다. 노래가 흐르고 세바스찬과 마리아는, 토마토 케첩 옆에서, 세탁 비누와 세제들 옆에서, 과자봉지들 사이로, 활보하며 춤을 춘다. 그런데 사실 우린 이런 장면을 오래전에 어떤 영화에서 본 적이 있다. 무성영화 코미디의 대가 찰리 채플린이 연출한 영화사의 유명한 정전 <모던 타임즈>에서다. 20세기 초 산업화의 광풍이 인권을 넘어뜨리던 그때의 미국을 배경으로 등장했던 장면이 21세기에 들어 경제 위기로 인권이 넘어지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배경으로 다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서로의 모국어가 달라 영어로 겨우 소통하고 대부분은 그냥 느낌으로만 서로의 말을 알아듣는 세바스찬과 마리아, 그들 사이에서 중요한 건 언어가 아니라 표정이나 몸짓이다. 그러니 한밤에 슈퍼마켓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춤사위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모든 장애를 뛰어 넘는, 사람 사이의 진짜 언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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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사랑, 그리스>라는 이 영화의 국내 개봉 제목은 역설적인 것 같다. 이 영화가 그려내는

국가로서의 그리스에는 사랑할 만한 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무리 불행해도 사랑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이 있기에 이 제목은 역설적인 것처럼 느껴진다글마무리기호 

 

 

 

 

글중간기호

 

정한석 님은

저서로 <성질과 상태>를 펴냈으며,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입니다.

 

사진제공 _ 영화 홍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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