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 > 인권수첩 > ② 우리가 밝혀야 할 것들 -5·18 진상 규명을 위해

인권수첩 [2018.05] ② 우리가 밝혀야 할 것들 -5·18 진상 규명을 위해

글 이재의

 

한꺼번에 76명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1980년 5월 20일 광주 중흥동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서 작은 음식점을 운영하던 정○○씨는 곤로에 넣을 기름 사러 간다며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5월 22일 광주에서 계엄군을 피해 고향 선배와 함께 고흥 시골집으로 향하던 17살짜리 고교 2학년생 임옥환도 조선대학교 뒷산을 넘어가다 사라져 버렸다. 이들의 생사는 38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오래된 듯 보이는 흑백사진에는 전남대학교 정문을 바라보고 있는 많은 전경이 있고, 그들과 대치하는 시민들이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이라고 쓴 현수막을 들고 있습니다.  

<사진 제공 518기념재단, 사진 촬영 나경택>           

 

 

그들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1990년 5·18 보상법 제정 이후 현재까지 행방불명자로 신청한 사람은 441명이다. 이 중 76명만이 5·18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유전자 감식 등으로 시신이 확인된 6명을 제외한다면 나머지 70명은 아직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행방불명자의 40% 정도가 항쟁이 가장 치열했던 1980년 5월 20일과 21일 양일간 발생했다. 5·18기념재단은 지난해 말 시신 암매장 소문이 떠돌던 광주교도소 주위에서 발굴을 시도했지만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특별법』(이하 ‘특별법’)이 지난 2018년 2월 28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행방불명자들의 행적이 밝혀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본격적인 진상 규명 활동은 시행령이 완비되는 9월부터 시작될 예정이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5·18 진상 규명에 ‘피로감’을 드러내는 반응도 없지 않다. 지금까지 국가기관이 나서서 5차례나 5·18 진상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국회 광주특위(1988), 12·12와 5·18 재판(1994~1997), 국방부과거사 진상규명위원회(2005~2007),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2005~2010), 최근에는 국방부 5·18 특별조사위원회(2017) 등이 조사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지난 38년 동안 진상 규명 과정을 뒤돌아보면 왜 성과가 없었는지 알 수 있다.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법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끊임없이 요구했지만 번번이 묵살되었다. 기껏해야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1995.12.21.) 제정에 따라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보상, 국가기념일 제정(1997) 등 보상과 기념사업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말하자면 5·18 문제 해결의 5대 원칙 가운데 첫 번째 원칙인 ‘진상 규명’이 흐지부지한 상태에서 보상과 기념사업이 먼저 이뤄진 것이다. 광주 학살을 자행한 가해자 집단이나 그 맥을 잇는 세력들이 정치 권력을 장악한 상황에서 진상규명특별법을 제정하기란 쉽지 않았다. 화해를 앞세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도 5 ·18 진상 규명은 뒷전이었다.


진상 규명이 철저하지 못한 틈을 비집고 왜곡이 판을 쳤다. 광주 시민들은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 견디기 힘든 별의별 수모와 모욕을 당했다. 인터넷에서는 5·18 때 희생자들의 사진을 ‘홍어 택배’라고 조롱하거나, 멀쩡한 시민을 ‘광수(북한에서 광주에 침투한 특수군이라는 의미)’라고 비아냥거렸다. 학살의 주모자로 사법 심판을 받았던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당시 북한군의 개입이 있었던 것처럼 진실을 호도했다.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폭동’이라고 떠들어대는 자들도 없지 않다. 이처럼 도를 넘는 왜곡과 폄훼가 『5·18진상규명특별법』 제정의 배경이 됐다.

 


흑백사진입니다. 맨 앞엔 민족 민주화 성회,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라고 써있는 현수막을 든 사람들과 그 뒤를 커다란 태극기를 여성 여덟명이 나누어 들고 걷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많은 사람들이 양복을 입고 행진 중인 모습입니다.

 <사진 제공 518기념재단, 사진 촬영 나경택>

 

우리가 밝혀야 할 것들

 

이번 특별법은 과거 반복된 조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밝히지 못한 채 넘어왔던 경험에서 교훈을 얻었다. ‘진상 규명 범위(제3조)’에 조사해야 할 대상을 분명히 했다. 첫째, 5·18 기간 중 계엄군이 자행한 무차별적인 민간인 학살, 헌정 질서 파괴 행위 등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과 조작 의혹 사건 모두가 조사 대상이다. 여기에는 진상 규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발포 명령자’를 비롯하여 ‘북한군 개입’ 여부도 명시돼있다. 둘째, 5·18 이후 현재까지 공권력에 의해 불법적으로 저질러진 ‘기획적 왜곡 조작 시도’를 진상 규명 범위에 포함시켰다.

즉, 특별법에서 정한 진상 규명 대상은 ① 5·18 당시 미확인 과제(최초 발포 책임자 및 암매장지 등) ② 5·18 이후 공권력의 기획적 왜곡 조작 시도(511연구위원회 및 북한군 개입 여부 등)로 구분할 수 있다.

 

발포명령 등이 지금까지 잘 밝혀지지 않았던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전두환·노태우 집권 시기에 국가기관이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 핵심 문서들을 불법적으로 은폐 조작하거나 폐기했기 때문이다. 특별법 제3조 제3항 ‘1988년 국회 청문회를 대비하여 군 보안사와 국방부 등 관계기관들이 구성한 ‘511연구위원회’의 조직 경위와 활동 사항 및 진실 왜곡, 조작 의혹사건’을 조사 대상에 명시한 것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이다.


511연구위원회는 5·18 발발의 원인을 공수부대의 잔혹한 진압 때문이 아니라 학생들의 과격 시위가 촉발시킨 것이라고 왜곡했다. 5·18의 성격을 좌익 세력이 주도한 이데올로기적인 폭동으로 포장하기 위해 ‘교도소 습격 사건’을 조작했다. 이와 같은 5·18 왜곡의 진원지가 바로 국방부가 1988년 국회 청문회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했던 ‘5 11연구위원회’였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은 권좌에서 물러났고, 이듬해 4·26총선에서 ‘여소야대’ 구도가 만들어졌다. 야 3당은 ‘광주문제조사 특별위원회’구성과 국정조사 방침에 합의했다. 국방부는 5월 11일 국회 청문회에 대비해 보안사령부 주도로 국방부, 합동참모본부, 육군본부,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참여하는 조직을 비밀리에 만들었다. 이 조직을 5월 11일에 만들었다고 ‘511연구위원회’라 불렀다. 군 자료를 광범하게 취합해 공수부대의 작전 문서 등 유력한 핵심 증거들을 조작하거나 아예 없애버리고, 왜곡된 논리를 만들어서 청문회에 나서는 군 측의 증인들에게 제공했다. 이런 ‘범죄행위’가 비밀리에 이뤄졌던 것이다.

 

발포 명령자를 찾아라

 

511연구위원회가 가장 초점을 맞춰 진실을 감추려 했던 부분이 바로 ‘발포 명령’이다. ‘자위권 발동’ 주장은 발포 명령을 은폐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에 불과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장 난동의 실태, 자위권 행사의 불가피성, 실탄 분배 시기, 시민군의 선제 무장설 등 511연구위원회에서 작성한 군의 대응 논리는 대부분 ‘발포 명령’을 감추기 위한 의도를 담고 있었다. 511연구위원회의 ‘자위권’ 프레임은 국회 청문회(1988)를 거쳐 검찰수사 및 재판(1997),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2007) 등을 거치면서 관철되었다. 국가기관의 조사 활동에도 불구하고 발포 명령은 밝혀지지 않았다. 511연구위원회 보고서에서조차 군 자료의 부실과 핵심 자료의 멸실 파기를 지적할 만큼 중요한 자료들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마치 발포 명령은 없었고 자위권이 진실인 것처럼 굳어져가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국방부에 설치된 5·18 특별조사위원회가 5개월간 치밀한 조사 끝에 5·18 때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를 통해 마침내 자위권 프레임이 깨졌다. 헬기에서 지상을 향해 발포한 것이 자위권으로 합리화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이번이 5·18에 대한 ‘마지막 진상 규명 기회’일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촛불혁명이 만들어낸 소중한 기회다. 하지만 벌써부터 우려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미 핵심적인 군 문서들이 상당 부분 조작되거나 폐기되어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증거(smoking gun)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다. 부족한 증거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수집·보관하고 있는 문서들 속에서 상당 부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아울러 그간 쏟아져 나온 수많은 5·18 관련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자들도 충분치 않다. 조사 인력 규모를 50명 이내로 제한(특별법 제17조 제1항)하고 있는 점도 문제다. 세월호 특별법은 120명, 반민족행위 특별법은 55명이었던 데 비해 사건의 규모나 복잡성이 훨씬 큰데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다. 필요하다면 시행령을 보완해야 할 부분들이다.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고 진실을 밝히는 것은 더 이상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는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광주를 벗어나 온 국민의 성원과 관심이 진상 규명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재의 님은 5·18기념재단 자료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광주민주항쟁을 다룬 책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의 공동 저자입니다.

 

화면해설.
이 글에는 5·18 민주항쟁 기자로서 당시의 상황을 직접 촬영한 나경택 님의 사진으로, 전남대학교 교문앞에서 비상계엄 즉각 해제하라는 현수막을 펼쳐든 학생들과 무장한 군인들, 최류탄을 쏘는 차가 대치하고 있는 사진과, 태극기를 펼쳐들고 대로를 행진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총학생회, 그 뒤를 일반 시민들이 끝이 보이지 않게 길게 줄지어 행진하고 있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