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 > 열린 생각 >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서

열린 생각 [2019.06]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권리를 찾아서

글 김정열

 

2018년 12월 17일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121국의 찬성으로 농민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권리 보장에 관한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선언」(이하 ‘농민권리선언’)이 채택됐다. 우리 농민들에게는 가뭄의 단비만큼이나 기쁜 소식이었다.

 

1

 

그 해, 농민들의 외침

지난해 12월 17일 뉴욕에서 날아온 그 소식을 듣고, 2015년 11월 14일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다 작고한 한 농민이 떠올랐다. 쌀값은 30년 전인 1990년대 가격으로 몇 년째 폭락해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유럽, 중국 등을 포함한 50여 개가 넘는 국가들과 맺은 자유무역협정으로 전 세계 농산물들이 한국 시장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값 받는 농산물을 찾아보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2015년 초겨울, 농민들은 1년을 기다려 대통령에게 농민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서울에 모였다. 농민들은 구름같이 모였다. “대통령은 공약 사항인 쌀값 21만 원을 지켜라”, “농산물 값 보장하라” 그들의 외침이 울리는 가운데, 한 농민이 경찰이 쏜 물 대포에 맞아 사망했다.

 

농산물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권리

농민권리선언은 모든 사람들이 안전한 먹거리를 그 문화적 맥락에 맞게 충분히 섭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권리임을 재확인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국제 인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먹거리에 관한 권리와 건강권에서 보장하고 있는 내용으로 먹거리의 생산 및 소비와 직결돼 있다. 그러나 정작 먹거리를 생산하는 주체인 농민이나 농어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가 충분히 보장되지 못해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먹거리 생산은 자꾸만 멀어져 갔다.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먹거리가 건강하게 생산돼야 건강한 삶과 환경이 형성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가 매일 섭취하는 쌀과 잡곡 그리고 채소 및 육류의 가격은 다른 생활필수품 가격과 공공재 가격의 상승에 미치지 못했다. 반면 농산물 생산의 기반이 되는 토지 가격은 개발로 인해 치솟았다. 토지는 더 이상 일궈야 할 땅이 아니라 건물을 세우는 장소이거나 투기의 대상이 됐다. 농사일은 매우 고된 노동이지만 그 생산물 가격이 낮아 농민들의 손에 들어오는 대가는 도시의 노동자들에 비해 매우 낮다. 먹거리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마트나 시장에서 구매하는 가격이 높을 수 있지만 이는 이동거리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5%가 먹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이 가운데 소규모로 경작하는 농민들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대규모 경작 농민은 0.6% 정도다. 토지를 임대해 농사를 짓는 농민들은 65%에 이른다. 그렇다면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로 생계를 충분히 보장받을 수 없다면 어떻게 될까? 농촌을 떠나거나 농산물 가격이 낮은 만큼 비용을 낮추도록 애쓰게 될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차라리 생산된 작물을 팔지 못하고 갈아엎기도 한다. 대규모로 경작하는 농민들은 그래도 생계를 보장받지만 전체 농민 중 매우 낮은 비율임을 알 수 있다.

 

2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

다른 나라와의 무역협정은 농산물 가격을 떨어뜨리고 초국적기업이 생산하는 화학물질과 오염물질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유전자 변형(GMO) 식품들이 땅과 식탁을 침투하게 했다. 농민들은 화학제를 사용할 것인지 말 것인지,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씨앗을 심을 것인지 말 것인지, 현재 그리고 앞으로 농사를 어떻게 지을 것인지 등 선택할 수 있는 권리조차 박탈당한 상태다. 지금까지의 농업은 농민들이 원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농민들이 토지와 자연 자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보호·보존할 권리(5조, 10조, 18조), 유해 물질과 화학품을 사용하지 않을 권리(14조), 농민들이 먹거리와 농업체계를 결정할 권리(15조), 농민들의 적절한 생활 수준을 보장받을 권리와 생산 수단에 관한 권리, 종자에 관한 권리(16조, 19조), 모든 자연 자원을 지속 가능하게 사용하고 관리하고, 안전하고 평화롭고 존엄하며 문화를 발전시키면서 살아갈 장소에 대한 권리와 토지에 대한 권리(17조)가 선언에 명시돼 있다. 선언은 이 권리를 향유하려고 노력해 온 소농들과 여성농민들의 권리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또한 이미 농촌 노동자들이 형성돼 온 농업 현실을 비춰 농사짓는 일이 노동으로서 그 권리를 보장받아야 함을 인지하고 있다(13조).

이러한 권리를 선언한다는 것은 그동안 이런 권리가 인정받지 못했고 박탈당해 왔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 권리는 우리 모두가 향유해야 할 권리와 다르지 않다. 다만 농민들이나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자연 자원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고 훨씬 가깝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를 보장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권리, 특히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먹거리와 환경에 관한 권리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세계의 수많은 농민과 농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빈곤과 기아, 영양실조, 질병 등으로 고통받고 있으며, 여성농민과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불평등과 차별,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로 인한 부담 등으로 농촌이 붕괴되고 있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선언문 제정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현재의 농촌 상황을 개선하고 농민의 권리를 보호·보장하는 것이 인류의 기본적 권리를 증진함은 물론 인류의 지속 가능한 먹거리, 지속 가능한 지구 생태계를 위한 필수 요소라고 판단했다.

농어촌과 농어민이 없는 사회를 상상할 수 있을까? 산과 들, 바다는 그저 감상하는 아름다운 경관으로만 존재하는 자연이 아니다. 자연은 우리 인간과 함께 살아갈 때 존속할 수 있다. 땅이 건강하게 일궈질 때 인류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농민과 농촌 노동자들의 권리는 바로 인류의 권리이자 인권이다.

 

 

김정열 님은 비아캄페시나에서 국제조정위원으로 있습니다.

 

 

 

이전 목록 다음 목록

다른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