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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인2 <특집> [2019.11] 워킹푸어와 한국의 사회권

글 남재욱

 

열심히 일을 하면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새로운 빈곤의 유형인 워킹푸어가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없는 것이다. 워킹푸어를 탈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새로운 빈곤의 유형, 워킹푸어

‘워킹푸어’라는 말은 ‘풀타임으로 일을 해도 가난한 사람’을 가리킨다.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꽤나 익숙한 말이지만, 사실 이 말이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적어도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에서 가난은 모종의 이유로 일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현대적 복지국가의 핵심 프로그램인 사회보험은 바로 ‘일하지 못함으로 인해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의미의 ‘가장’(家長)이 사망해서, 장애가 있어서, 아파서, 나이가 너무 많아서, 혹은 일시적으로 실업 상태여서 등의 이유로 일할 수 없을 때, 노령/유족연금, 산재보험,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의 제도를 통해 빈곤을 예방하는 제도가 사회보험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프로그램은 적어도 선진 복지국가에서는 잘 기능해왔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프로그램들이 효과적으로 설계됐기 때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설계가 효과적일 수 있었던 환경이 이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워킹푸어’는 이와 같은 안정된 노동시장과 사회보험 중심 복지제도로 구성된 전통적 복지국가의 해체 속에서 나타났다. 1980년대 이후 경제적 세계화, 기술변화, 서비스 경제로의 전환 등의 거시적 변화를 배경으로 대부분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고용 안정성이 약화되고 비표준적 고용이 증가했다. 실업률이 상승했을 뿐 아니라 실업기간도 늘어났고, 주변부 일자리와 실업 사이를 오가는 불안정 노동계급(precariat)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일자리 안정성과 소득 불평등은 심화됐고, ‘완전고용’과 ‘표준적 고용관계’라는 전후 복지국가의 근간은 크게 약화되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기술변화의 가속화로 급증하기 시작한 ‘디지털 플랫폼노동’과 같은 ‘모호한 노동’의 증가는 고용관계를 기반으로 일하는 사람을 보호하던 기존의 시스템 자체를 뒤흔들고 있다. 안정적 노동시장을 전제로 노동시장에서 불가피하게 이탈하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계된 사회보험은 이와 같은 변화로 인해 과거만큼 효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는 ‘가난은 일하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라는 기존의 통념을 뒤바꿨다. 하루 종일 일하고 있지만, 아니면 적어도 일할 자리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안정적으로 삶을 꾸려나가기 어려운 ‘워킹푸어’가 새로운 빈곤의 한 유형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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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인 어려움에 빠져 있는 한국의 노동시장

한국의 상황 역시 다르지 않다. 아니 사실 한국의 상황은 더 나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단기간 내에 고도성장을 거친 한국의 노동시장은 서구와 달리 산업사회의 근대적 노동규범이 온전히 자리매김하지 못한 상태에서, 탈산업사회의 노동시장 불안정 문제를 경험하게 되었다. 한국의 일터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고용계약서 미작성, 최저임금 미준수, 장시간 노동 등의 위협과 같은 상황은 ‘전근대적 노동시장’ 관행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다. 반면 IMF 이후에 급증한 비정규직, 고용의 단속성과 이동성 증가 및 이로 인한 불안정 노동 문제는 ‘탈근대(탈산업사회) 노동시장’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한 국가 안에 전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 속에서 한국의 ‘일하는 사람’들은 중첩적 불안정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이와 무관하지 않은 이유로 한국의 사회보장 제도 역시 이중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서구 복지국가와 달리 사회보험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아 의무적인 적용 대상조차 제도 안으로 다 포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특수형태고용, 디지털 플랫폼노동, 초단시간 노동 등 사회보험 제도원리상 충분히 보호받기 어려운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노동시장에서 나타나는 ‘전근대-탈근대’의 공존 문제가 사회보장에서 그대로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불안정 노동은 1차 분배에서, 사회보장은 2차 분배에서 문제를 일으키게 되고 그 결과 중 하나가 바로 워킹푸어다.
이와 같은 노동시장과 사회보장제도 현실 속에서 워킹푸어는 반복되는 빈곤문제가 되기 십상이다. 한국은 기업규모별(대중소기업), 고용형태별(정규직, 비정규직), 성별 임금격차가 모두 매우 크다. 이 때문에 한국의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국제적으로 비교했을 때 항상 최상위권에 속한다. 일자리의 안정성을 보여주는 평균근속기간은 2018년 기준 6년 1개월로 OECD에서 가장 짧으며, 특히 비정규직의 평균근속기간은 2년 7개월에 불과하다. 이직이 활발하다는 이야긴데, 실업자 대비 구직급여 수급율은 최근 3년간 40% 내외로 실업자 10명 중 6명은 실업급여를 받지 못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고용보험 가입률이 비정규직의 경우 43.6%로 낮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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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푸어의 해결방안은 없을까

따라서 노동시장 주변부에 취업한 인구는 저임금을 받으며, 실업의 위험이 높고, 실업할 경우 사회안전망으로부터도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안전망으로부터의 배제는 워킹푸어들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아 이동하기 위한 투자보다는 당장의 생계를 잇기 위해 노동시장 주변부로 재취업하게 압박하는 요인이 된다. 그 결과 다시 한 번 저임금과 높은 실업위험에 노출되게 한다. 2017년 기준으로 한국의 근로연령대 인구(18~65세) 빈곤률은 12.7%로 OECD 35개국 중 12번째로 높다. 이들 모두를 ‘워킹푸어’라고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수의 ‘일 하는 사람’ 혹은 ‘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실업과 불완전 취업을 오가며 반복되는 빈곤을 경험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32조는 모든 국민이 ‘근로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국가는 근로자의 고용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을 담고 있다. 물론 헌법재판소의 판례는 근로의 권리가 직접적으로 일자리를 요구할 권리가 아니라고 판시하고 있지만, 지금껏 살펴본 한국의 노동시장 현실과 워킹푸어의 상황은 ‘국가가 과연 근로의 권리를 실질화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질문하게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빈곤의 반복 속에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지도, 사회보장제도를 통한 지원 속에서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지도 못하는 워킹푸어의 현실은 이들의 사회권적 기본권 자체가 위협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워킹푸어들의 위협받는 사회권을 보장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 여기에는 왕도가 없다. 어떤 획기적이고 기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워킹푸어의 상황을 일거에 개선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들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은 제대로 실행하지 못해왔던 과제를 차근차근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이 정책들의 구체적인 논의는 불가능하지만, 어떤 방향의 조치가 필요한지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로는 워킹푸어에 대한 최소한의 보호, 즉 사회안전망 강화가 필요하다. ‘고용’을 근간으로 하는 고용보험 체계를 넘어서 ‘인간’을 보호할 수 있는 제도들이 필요하다. 여기에 복지 선진국들이 논의하고 있는 사회적 인출권(social drawing rights) 개념을 도입하는 방안 등도 검토할 만하다.
두 번째로는 ‘보호’를 넘어 워킹푸어가 장기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기 위한 사회적 투자가 필요하다. 평생 동안 사회안전망에 의존하여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워킹푸어 개개인의 상황에 대해 파악하고 이들에게 적합한 지원을 제공하는 고용서비스와 이들이 자신의 인적자본에 투자하고 이를 기반으로 소득능력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평생학습 차원의 지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가장 어렵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가 괜찮은(decent)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다. 사회적 투자를 통해 워킹푸어들이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춘다고 해도 이들이 취업할만한 괜찮은 일자리가 희소하다면 그 효과는 매우 제한적이다. 이들이 자신의 인적자본에 투자한 결과를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존재할 때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 자체도 더 적극적이 될 수 있다. 이 세 방향은 워킹푸어에 대한 보호, 이들의 인적자본 축적에 대한 지원, 그리고 이들의 인적자본 활용을 위한 기회의 마련으로 요약할 수 있다. 막상 이렇게 요약하고 보면 처음 드는 생각은 “누가 그걸 몰라?”일 수도 있다. 노동시장 문제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과제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기발한 책략과 새로운 아이디어의 실현보다는 잘 알고 있는 과제들의 단계적 실행에 가깝다. 결국 문제는 실행이고, 그 실행이 이루어질 때 우리 사회 워킹푸어의 잃어버린 사회적 권리를 단계적으로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남재욱 님은 사회복지학 박사이자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부연구위원 직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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