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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총리가 나올 수 없는가

[특집] 생각하기 [2020.03] 왜 우리나라에서는
핀란드 총리가 나올 수 없는가

글 김윤철 교수(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다수의 사람들은 정확히 알고 있다. 정치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을 때만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민심과 민생을 우선한다는 것을. 새로운 시대에 조응하는 정치를 위해서는 젊고 새로운 세대와 약자와 소수자를 포함한 다양한 세력들이 정치적 대표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을. 그런데 2019년 12월 핀란드에서 34세의 여성 총리가 나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한국 사람들은 놀라움과 부러움을 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산나 마린(Sanna Marin) 같은 정치인이 등장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들을 다시금 자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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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젊은 정치인들

산나 마린은 단지 34세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는 것만으로 주목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의 삶과 정치 이력을 보면 그의 등장을 가능케 한 핀란드의 정치·사회·문화적 환경의 특성을 포착할 수 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와 이혼 후 동성 가정을 꾸린 어머니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국의 기준에서 보자면 결코 ‘유복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산나 마린은 탐페레 대학교에 들어가 재학 중 사회민주당에서 청년단 활동을 했고, 23세에 정치에 입문해 27세에는 시의원이 되어 풀뿌리 정치를 펼칠 수 있었다. 30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34세에 장관과 총리를 연이어 맡았다.
이러한 이력을 ‘입지전적 인물’이나 ‘고속 출세’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가 있다면, 그는 시대에 뒤쳐진 사람일 것이다. 정치적 지위의 획득을 ‘개인의 초인적 역량에 기댄 사적인 입신의 문제’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산나 마린과 같은 정치인의 등장 현상은 핀란드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스웨덴 같은 다른 북유럽 국가와 독일처럼 ‘시민정치교육과 정당민주주의와 복지국가 체제’를 비교적 잘 운영하는 나라라면 드물지 않게 일어난다. 시야를 넓혀 뉴질랜드, 캐나다 등으로 고개를 돌려도 같은 경우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의 등장이 중요한 것은 단지 나이 때문만이 아니라 이념과 정책적 차원에서 대체로 진취적이라는 데 있다. 성과 인종, 종교, 계급 등을 넘어서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다’는 신념을 보유하고 있다. 무한경쟁·각자도생·승자독식과 같이 공동체를 해체로 이끄는 운영원리를 수용치 않는다. 산나 마린이 그렇고, 2017년 37세에 총리가 된 뉴질랜드 노동당 저신다 아던(Jacinda Ardern)이 그렇다. 생태주의와 같은 대안이념과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세에 국회의원이 되었고 31세였던 2014년 교육부 장관이 된 스웨덴 녹색당 구스타프 프리돌린(Gustav Fridolin), 2002년 19세의 나이로 연방의회 의원이 된 독일 녹색당 안나 뤼어만(Anna Lührmann) 등이 그 예다. 2015년 43세에 총리가 되어 내각의 절반을 여성으로 꾸렸던 캐나다 자유당의 트뤼도가 “왜 그랬느냐”는 질문에 “지금은 2015년이잖아요”라고 답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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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그들’이 없는 이유 ①
정치적 무관심이라는 현실

우리나라 2030세대 국회의원은 20대 국회에서(2019년 기준) 단 3명에 불과하다. 국회의원 평균연령은 58세이고, 장관 평균연령은 60세다. 여성의원 비율은 17%에 그쳐 OECD 회원국가 중 하위권이다. 왜 한국에서는 핀란드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이유는 정치 참여는 물론 정치에 대한 관심조차 갖지 못하게 만드는 ‘탈정치적 현실’과 그러한 탈정치적 현실을 공고히 하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연’ 때문이다. 한국이 핀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와 달리 시민정치교육과 정당 민주주의 그리고 복지국가 체제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는 삶의 현장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공적으로 해소하고 공존의 지대를 만드는 활동이 아니다. 강자와의 사적·개별적 다툼에서 필연적으로 패배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포괄하고 보호하는 활동이 아니다. 즉, 강자들만의 놀이터다. 그래서 다수의 보통사람에게 정치는 관심사일 수가 없다. 자신에게 아무런 효능감도 제공치 못하는데 어떻게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게다가 어릴 때부터 집과 학교에서 들어온 것은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정치 관련 과목을 선택하는 학생이 거의 없으며 새로운 정치를 꿈꾸며 관심을 갖고 참여하려 하면 온갖 장벽에 부딪힌다.
선거권을 갖지 못하면 정당에 가입도 할 수 없다. 만 18세로 선거연령을 낮추었지만 학교에서 정치교육을 받을 수도 없다. 정치는 청(소)년들이 넘봐서는 안 될 세계로 굳어져 있다. 선거권을 갖추고 대학에도 들어가고 정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선거에 나가려고 하면, 당 지도부는 당 밖에서 인재영입과 전략공천을 언급하며 법조계·경영계·관계 등에서 화려한 경력을 쌓아 이미 부와 권력과 명성을 거머쥔 누군가를 데려 온다. 대부분이 갈등의 현장에서 동분서주하며 사람들을 달래고 지켜줬던 경험이 전무하고 또 갈등 해소에 필요한 대안을 내올 이념과 정책이 뭔지도 불분명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당의 이미지 쇄신을 명분으로 인지도가 높다며 데려온다. 그들의 갑작스런 입신양명을 보면 정치에 대한 회의가 심해진다. 이런 현실에서 어릴 때부터 공적 문제에 관심을 갖고, 정치적 해결을 꿈꾸고 도모하고, 그 과정에서 실제 책임을 맡아 본 경험을 쌓은 산나 마린 같은 이가 나올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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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그들’이 없는 이유 ②
심각한 부의 집중 현상

더 심각한 문제는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연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가장 심각한 장시간·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비정규직─혹은 불안전─노동자층이 여전히 노동인구의 60%를 상회한다. 이런 노동 현실에 처해 있는 서민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관련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이 얼마나 용이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육체적 휴식마저도 사치인 현실에서 정치 관련 지식과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석할 여유를 갖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작고한 노회찬 의원이 생전에 “6411번 버스를 아시나요”라는 연설을 통해 환경미화 노동자들처럼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출근해야 하는 서민들이 정치로부터 유령 취급을 받는다며 일갈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산나 마린이 한국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과연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민주당과 같은 정당의 청년당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을까? 답은 부정적이다. 직장 내 괴롭힘을 포함해 사회경제적 약자에게 자행되는 갑질의 물적 토대는 여기서 나온다. 어린 특성화 고교생마저 죽음으로 내모는 산업재해 강국의 위상 역시 마찬가지다. 굶어 죽지 않으려면 저임금·장시간 노동은 물론, 인격적 모욕과 생명의 위협을 감수하며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 특히 노조라는 조직재화를 보유하고 있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는 더 그렇다. 개인사업자라는 미명 때문에 노동자에 대한 제도적 보호망에서 배제되어 있는 택배기사 등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누가 한국의 산나 마린이 될 수 있을까? 만약 되었다면 그야말로 ‘초인’이리라.
한국은 소득대비 투표율 격차에서도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2015년 기준 상위소득 20%는 투표율이 거의 100%에 가깝지만, 하위소득 20%는 70%에 불과한 것으로 보고됐다. 사회경제적 민주화의 지체가 정치적 불평등마저 낳은 것이다. 이런 ‘이중의 불평등’을 극복하려고 해도 새로운 정치가 필요한데, 빠른 시일 내에 그것의 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실정에 놓여 있다. 그럼 절망이 답인가? 그렇지는 않다. 어려움 속에서도 새로운 정치를 시도해 온 청년들과 정치세력들이 계속 존재해 왔다. 최근 들어서는 시민정치교육 기관도 여럿 생겨나 활동하고 있다. 대안정당에 대한 시민사회의 요구도 꽤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아직 활성화되고 있지 못하나 중등 및 고등교육 과정에서 시민교육의 활성화 요구도 높고, 그에 부응하기 위한 제도화도 일정하게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공동체에 속한 모든 이의 것이고, 민주주의는 보통사람들을 위한 통치체제이고, 사회경제적 부와 자원의 소유는 공동체의 유지와 재생산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정당하다는 인식을 키워갈 수 있을 것이기에.

 

 

김윤철 교수는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에서 '인간, 시민, 정치'를 주제로 한 과목을 가르치고 있으며 실천교육센터장과 노회찬 재단 정치학교 담임을 맡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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