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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이유

[특집] 마주듣기 [2020.03] 우리에게 페미니스트 정치가
필요한 이유

글 임선희 활동가(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 국가로 진입했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성평등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다’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오랫동안 싸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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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치의 얼굴, 고학력, 이성애자, 비장애인 남성

최근 들어 여성들은 강남역 여성혐오 살해사건, 촛불혁명, #미투운동 등을 거치며 정치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며 직접 행동에 나서고 있다. 2012년 국회의원 선거를 기점으로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 여성의 투표율, 2018년 불법촬영 편파수사를 규탄하기 위해 혜화역에 모인 20만 명 이상 여성들의 국회의원 문자총공(문자 총공격), 여성의당 창당 그리고 텔레그램 n번방 국회 국민동의청원 10만 명 달성 등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페미니스트 정치에 대한 요구와 필요성이 높다.
특히 20대 여성은 ‘투표를 하면 정치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느끼는 투표 효용감이 다른 세대의 여성이나 20대 남성과 비교해봤을 때 높게 나타났다. 20대 여성의 58.5%가 ‘투표를 하면 정치가 달라질 것이다’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20대 남성 51.1%, 30세~44세 여성 40.5%, 45세 이상 여성 38.0%에 비해 높은 수치다.
제헌 국회부터 20대 국회까지 국회는 줄곧 남성의 차지였다. 제헌국회(1948년)부터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기 전인 제16대 국회(2000년)까지의 여성 국회의원 평균 비율은 0.62%에 불과했다. 제헌국회, 제7대, 제8대, 제9대, 제13대, 제14대 국회는 여성의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제17대 국회(2004년)부터 비례대표제가 도입되고, 2005년 「공직선거법」 제47조3항 개정으로 비례대표 후보 순위의 홀수 번호에는 여성을 추천해야 한다는 조항이 마련된 후 여성 국회의원 수는 다소 늘어났지만 그럼에도 제17대 국회부터 제20대 국회에서의 평균 여성의원 비율은 14.8%에 그쳤다. 현재 제20대 국회도 국회의원 총 300명 중 남성의원은 249명, 83%에 달하며 여성의원은 단 51명으로 17%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광역단체장 100%, 기초단체장 96.5%, 광역의회 80.6%, 기초의회 69.2%가 남성이다. 한국 정치는 평균 연령 50세 이상, 고학력자, 이성애자,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남성은 숫자뿐만 아니라 국회 내 권력도 독점하고 있다. 제20대 국회 기준, 상임위원회와 상설특별위원회에 여성이 위원장인 위원회는 전체 18개 중 3개인 16.7%에 불과하다. 역대 국회의장과 부의장에 여성의원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었다. 한국여성의정이 전·현직(17대~20대) 여성 국회의원 14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의원이 의정활동 중 주요 어려움으로 삼는 것은 다름 아닌 남성의원 중심의 관행이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현재,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등록한 예비후보 중 여성비율은 (2월 12일 기준) 더불어민주당 13%, 미래통합당(당시 자유한국당) 12%에 불과하다. 각 정당의 공천현황 또한 여성 후보자는 전체 후보자의 10% (3월 15일 기준) 밖에 되지 않는다. 각 정당이 선거 전 공언한 ‘여성 후보 30% 할당제’는 지켜지지 않았을 뿐더러 현재의 여성, 청년 가산점 제도도 남성 권력에 균열을 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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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정치, ‘나중’이 아닌 ‘지금’ 필요한 이유

한국사회는 여전히 성폭력과 성차별이 만연하다. 온라인에서의 여성혐오와 폭력은 ‘n번방’, ‘다크웹’ 같이 이름만 바뀌며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다. 채용부터 업무배치, 승진으로 이어지는 노동시장의 성차별,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 노동과 이로 인한 고용단절, 성별직종분리와 성별임금격차로 여성의 삶은 위협받고 있다. 여성뿐만 아니라 장애인, 이주민·난민, 성 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혐오 역시 심각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권력자에 의한 온갖 형태의 성폭력 사건과 성폭력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하지 않고 비호하는 사법 권력의 이야기가 뉴스를 통해 보도된다. 이러한 상황에도 성평등과 인권의 문제는 정치에서 ‘나중’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의제로 간주된다. 지금의 현실에서 페미니스트 정치가 필요하고 중요한 이유이다.
2018년 #미투운동이 촉발된 후 국회의원들은 소속 정당과 성별을 불문하고 #미투법안을 경쟁하듯 발의했다. 아마 국회 역사상 젠더 폭력에 대한 법안이 단기간에 그렇게 많이 발의된 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젠더 폭력 법안에 대한 논의는 지난 2년간 국회에서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발의된 수백 개의 법안은 회기 만료로 폐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다.
최근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여성과 청년들이 늘어나고 있고 젠더 이슈를 해결할 수 있는 주요 주체가 입법 기관인 국회라는 것을 직시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늘어났지만 실제로 이것이 국회의원들의 입법 활동이나 정당 정책으로는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않고 있다. 기존의 정치영역은 위에서 살핀 것처럼 기득권, 이성애자 남성이 독점하고 있어 여성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힘든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정치세력화가 중요한 이유이다.
2018년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한국정부에 여성 국회의원 수를 증가시키기 위해 지역구 대비 비례대표제도 의석 비율을 확대하고, 여성 후보 공천과 관련하여 벌금부과 등의 강제 이행조치를 수반한 여성할당제를 도입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2018년 대한민국 제8차 정기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 제29조). 실제로도 지역구 후보 중 여성 30% 할당제는 「공직선거법」에 법제화되어 있고 대다수 정당의 당헌·당규에도 지역구 여성후보 할당제 30%에 대한 조항을 가지고 있지만 의무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어느 정당도 이 조항을 지키지 않고 있다.
여성이 국회에 더 많이 진입한다는 것은 더 많은, 더 다양한 삶의 모습이 정치에 반영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특정 연령과 계급, 학벌, 직업, 성별의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대변해주겠다고 나서는 불평등한 국회를 마주해왔다. 여성, 청년,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노동자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성평등 국회가 필요하다.
남성 독점 정치구조가 사라진 동수 국회가 있는 사회,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 및 권리가 보장되도록 임신중지에 대한 법적 제약을 완전히 제거하고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한 요건을 현재의 ‘폭행 또는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개정한 국회가 있는 사회, 성별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기본 법제를 마련하여 노동시장의 성차별과 성별직종분리, 성별임금격차가 사라진 사회,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통해 개인의 다양한 정체성이 존중받는 사회. 여성의 정치 세력화, 페미니스트 정치를 통해 꿈꾸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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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선희 활동가는 한국여성연합에서 지속가능한 성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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