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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23.04] 서로를 지켜주는 마음 위험의 간극을 메우다

 

제3조 모든 사람은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서로를 지켜주는 마음 위험의 간극을 메우다

 

몇 년 전일까? ‘인권’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생각할 일을 마주치고 말았다. 한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자가 핑크빛 임산부 보호석에 편안하게 앉아 있었다. 어쩌면 임산부일지도 모를 지친 얼굴의 여성이 그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여기 임산부 보호석인 것 알고 계세요?”

 

남자는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가 먼저 왔는데요.”

 

“이 자리는 임산부를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배려 차원에서 만들어진 자리인데...”

 

그 말을 듣자 남자는 혐오감에 가득찬 표정으로 여자를 한 대 때릴 듯이 노려보았다. “그래서 지금 나보고 일어나란 말예요?”

 

평범한 오후의 지하철 안이 순식간에 폭풍 전야처럼 변했다.

 

“내가 왜 일어나요? 나도 내 인권이 있어요. 임산부 권리만 중요하면 내 권리는? 여기 앉는 것은 나의 권리야.”

 

남자의 한마디로 지친 얼굴의 여성은 저 멀리 뻥 나가 떨어진 것처럼 사라져갔다. 이런 적대적이고 무자비한 개인주의는 어떤 생각으로 이어질까? 당신의 권리는 나의 권리를 침해할 뿐이고 그런고로 당신의 말은 부당하고 유효하지도 않으니 나는 결사항전의 자세로 내 권리를 지킬 것이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 뒤로도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유혈이 낭자한 콘텐츠(?)들이다. 이대로 계속 진행된다면 ‘모든 사람의 생명과 신체의 자유와 안전에 대한 권리’라는 말 자체가 갈기갈기 찢겨 허공으로 날아갈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 얼마든지 흉물스럽게 변할 수 있는 자아중심주의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모든 사람이 생명과 신체의 자유를 누리는 세상으로 걸어갈 수 있을까? 이것이 최근 몇 년 사이에 내가 세상에 품고 있는 질문이다. 즉, 나는 세계인권선언문 제3조가 어떻게 빈 말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말이 될 수 있느냐. 이것이 아주 궁금하다.

 

나는 아직 이론으로는 대답할 수 없다. 다만 삶으로는 ‘임시로라도’ 대답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서로를 지켜주는 마음 위험의 간극을 메우다

 

김용균은 태안 화력발전소에 비정규직으로 취직하고 살이 많이 빠졌다. 엄마는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안되겠니?” 라고 물었다. 김용균은 조금만 더 참아보겠다고 했다. ‘애어른’ 용균이는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엄마가 고생하는 것을 알고 어서 빨리 부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했다. 그러나 어쩌면 그날이 용균이를 살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른다고 훗날 엄마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날 붙잡지 못한 아쉬움을 뭐라고 표현할 수가 있을까? 하긴 그날만 아쉽겠는가? 만약 4년제 대학을 보냈더라면. 만약 조금 더 부자였더라면… 만약,만약… 모든 날이 아쉽다.

 

사고가 나자 아침 여섯시에 태안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아드님이 맞는지 확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대체 뭘 확인해 달라는거예요?” 차가 없던 부모는 구미역에서 기차를 타고,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여섯 시간 넘게 걸려 태안 의료원에 도착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엄마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 애는 기절해서 깨어나지 않는 것뿐이야!’ 의료원에 도착하자 부모는 중환자실로 뛰어갔다. 그러나 용균이 같은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남은 곳은 한군데 뿐이었다. 영안실이었다. 경찰이 서랍장을 열었다. 얼굴이 먼저 나왔다. 얼굴이 까맸다. 석탄가루 범벅이었다. 그 순간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부모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고 통곡했다. 그 통곡 소리를 무엇과 비교할 수가 있을까? ‘용균이는 알까? 우리가 여기 와있다는 것을. 혼자 죽은 내 아들. 나의 모든 것.’

 

태안 화력 발전소의 밤마다 김용균은 힘들 때 스마트 폰에 메모를 남겼다.

 

“용균아 힘내!”

 

용균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하던 말이다. 우리도 가끔 하는 일이다.

 

 

제주 서귀포에 있는 특성화고 실습생 이민호군의 아버지는 세월호를 타고 다니면서 화물차로 생수를 날랐다. 세월호 사고가 났을 때 민호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아빠 세월호 안탔지? 그치?”

 

우리가 했을 법한 질문이다. 아들은 그 질문 몇 달 뒤 현장 실습 나간 공장의 기계에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내가 그때 세월호에서 죽었다면 우리 아이는 살지 않았을까? 죄책감에 오래 시달렸다. 우리도 할 법한 생각이다. 양심은 이렇게나 복잡한 것이다. 민호의 아버지는 의사에게 두 번 무릎을 꿇었다. 한번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한번은 심폐소생술로 피가 너무 많이 솟구치는 아들을 이제 그만 보내주려고.

 

 

춘천 산사태로 딸을 잃은 어머니는 딸이 자원봉사를 간 춘천 지역에 폭우가 내리자 딸에게 이렇게 말했다. “비오니까 어디 돌아다니지 말고 숙소에 있어.” 우리도 했을 법한 말이다. 숙소가 무너져 내릴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대구 지하철 참사로 아내와 유치원생 딸을 잃은 아버지, 늦게까지 일하고 잠든 그는 사고당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서는 아내와 딸에게 거의 이렇게 말할 뻔 했다.

 

“내가 태워다 줄까?”

 

그러나 그는 몽롱한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아내는 화염 속 지하철 아수라장 속에서 딸을 온몸으로 덮다시피 끌어안았다. 아이의 뼈가 아내의 뼈보다 더 많이 발견되었다. 우리는 그 행동의 의미를 모르지 않는다. 우리도 할 법한 행동이다.

 

 

무와 무 사이, 그 사이에 뭔가가 있다

 

제주에 살던 이민호 군의 아버지가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 그 밤 함께 한 것은 그 전에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세월호 아버지였다. 자식을 잃은 두 아버지가 한 사람은 환자로, 한 사람은 보호자로 함께 있는 밤이 어땠을까?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만은 무한히 부드러운 밤이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가 났을 때 태안 해병대 캠프 참사 아버지들은 즉시 팽목항으로 출발했고 진도의 체육관과 경찰서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당신들 누구요? 뭐하는 사람들이요?”

 

“나? 나는 해병대 캠프에서 목숨을 잃은 아들을 둔 아버지입니다. 지금 잘하면 아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으로서 간곡히 부탁합니다. 꼭 좀 구해주세요.” 그 순간 내 자식의 목숨이나 남의 자식의 목숨이나 차별하고 말 것이 없었다. 똑같이 중요했다. 춘천 산사태 유족들은 자식들이 자원봉사를 하러갔다가 결국은 목숨을 잃은 상천 초등학교의 아이들을 위해 해마다 장학금을 기부한다. 자원봉사에 관한 조례 또한 개정했다. 그리고 나는 2022년에는 세월호 유족들이 이태원 참사 유족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시린 손을 비비며 촛불을 들고 있는 것을 지켜봤다. 이것은 이미 자식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행동일까? 아니면 반드시 해야 할 의미있는 행동일까? 혹시 의미를 물을 필요조차 없는 본능일 수도 있을까? 어쨌든 나는 인간은 무에서 태어나 무로 돌아간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게 되었다. 무와 무 사이, 그 사이에 뭔가가 있다. 덧없음과 덧없음 사이에 뭔가가 있다. 내가 본 것을 나는 아름다움이라고 밖에 아직은 달리 뭐라고 불러야할지 모르겠다. 이 아름다움이 차갑고 황량하고 적대적인 세상 속, 누구나 빠질 수 있는 현실의 위태로운 틈새를 약간이나마 메우고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

 

유족의 말이 나를 숙연하게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런 유가족이 더는 없는, 생명이 다른 것보다, 이를테면 경제적 이득보다 가치있게 여겨지는 세상을 꿈꿔야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생명을 잃는 것은 어떤 위로도 불가능한 슬픔,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수없이 많은 낮과 밤으로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괴로움이 가득한 삶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인권선언문이 세상에 문자로 떡하니 존재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근거가 될 것이다. 코로나 시기에 인권 선언문 제3조는 훨씬 복잡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우리의 생명과 안전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바이러스였다. 기후위기 시대인 지금은 기후가 우리의 생명과 안전에 영향을 미친다. 진보와 성장에 마음이 홀린 우리가 자연에 대한 숭배와 겸손을 잃은 것이 우리의 생명과 안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비록 유한한 생명체지만, 아름다움이란 단어도 영원이란 단어도 아는 인간인 우리가 다른 인간에게도, 자연에게도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 지켜야 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는 신념이 세계인권선언 제3조의 내용 속에 스며들어야 한다.


글. 정혜윤(작가, CBS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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