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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의 인권 [2023.04] 중환자실에서 바라본 ‘늑대’의 호소

 

김수련 <밑바닥에서>, 간호사가 들여다본 것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고 커튼이 날린다. 창문 너머 커튼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벽면에 물든 이미지가 김수련 지음 〈밑바닥에서〉의 표지 사진이다. 인간의 몸에 남겨진 상처를 해독하는 사회역학자 김승섭은 “환멸스러운 세상에 가닿는 사건은 정직하고, 그 세상을 살아내려 안간힘을 쓰는 이야기들은 끝내 다정하다.”고 썼다. 이 책을 품은 독자라면 판타지 병원 드라마의 단골 치어리더로 등장하는 간호사들의 왜곡된 서사를 밑바닥부터 의심하게 될 듯하다.

 

여기 한 간호사가 있다. 7년을 일한 병원에서 떠나는 날, 그는 바닥까지 소진되었다. 몸무게가 12kg 줄었고 온몸에 병이 들었다. 선배들의 선배들이 망가졌던 구덩이로 후배들이 계속 몰려와 쓰러졌다. 그는 이런 악순환을 후배들에게 물려줄 수 없어서 그만둔다고 했다. 김수련 간호사는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으로 그 변화가 벼락처럼 들이닥치길 바란다.”고 썼다.

 

그는 자신을 ‘늑대’에 비유했다. 코로나 팬데믹 한복판에서 의료계 병폐를 공개적으로 비판한 간호사, 후배를 때린 선배를 신고한 내부고발자, 법정 휴게시간을 요구한 노동조합원, 수습 기간도 근무 기간으로 인정해달라고 주장한 노동자, 병원의 부조리와 정부의 침묵에 저항하여 각종 시위를 주도한 요주의 인물…. 그는 그렇게 ‘늑대’로 살다가 일터를 떠났다.

 

김수련 간호사는 본래 김수영의 시를 좋아하는 국문학도였다. 옹졸한 삶을 살지 않겠다며 이미 죽은 자들이 쓴 글을 틈날 때마다 되새기는 야멸찬 사람이었다. 그의 고백에 따르자면 정의를 내세운 자들이 권력을 잡기 무섭게 오염되는 모습이 환멸스러워 권력과 관련 있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20대 청춘의 터널을 지나 한없이 실용적일 것이라 믿으며 선택한 직업이 간호사였다.

 

신참 간호사 시절 그는 ‘죽도록’ 바빴다. 혼자만 바쁜 게 아니라 모든 간호사들이 미칠 것처럼 바빴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어서 방광염에 걸리고 며칠씩 제때 밥도 먹지 못하던 반인반수의 시간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으면 쉬는 시간에도 죽을 계획을 세웠을까? 커피를 마실 때면 카페인의 치사량을 생각했고, 돌연사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내심 죽음을 부러워했다. 목숨을 끊기 전 119에 보낼 예약 문자를 적어둔 것만도 여러 번이었다.

 

이른바 ‘태움’ 문화가 젊은 간호사들을 죽음의 비탈로 몰아넣었다. 선배 간호사들이 후배 간호사를 괴롭히는 악습이 바로 ‘태움’이다. 30년 넘게 간호사로 일한 50대 수간호사는 ‘태움’을 일종의 직업적 관행이라고 설명했다. 사람의 생명을 돌보는 직업이다 보니 사소한 실수라도 좋은 말로 전달하기 어려운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이 대목에서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를떠올린다. 군대에 관한 대한민국 남자들의 비밀과 거짓말을 적나라하게 까발린 수작이다. 영화에서 후임병은 선임병처럼 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결국 군대의 고질적 폭력을 대물림한다. 영화의 선임병처럼 선배 간호사들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후배들을 ‘태움’으로 길들여왔다.

 

 

폭력의 대물림 ‘태움’, 공공의료 확대가 해법

 

김수련 간호사가 일한 곳은 S병원 중환자실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의 갈림길이 정해지는 숨 막히는 전쟁터다. 김 간호사는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절체절명 순간을 담담하게 기술했다. 나이 든 남자와 결혼해 스물에 아이를 낳고 심정지 상태로 쓰러진 결혼이주여성, 의식을 잃기 전 가족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사랑한다”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고작 “밥은 먹었냐?”고 묻는 이 시대의 아버지들, 제자들이 줄을 서서 찾아왔으나 정작 아무도 살피지 못한 노교수의 임종…. 그들 모두는 중환자실에서 죽었고, 간호사들이 마지막 길을 지켰다.

 

간호사의 눈에 비친 죽음의 모양은 대체로 질척거렸다.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마무리와 현격히 다른 실존적 체험이다.

 

저자는 환자의 뜻과 무관한 연명치료를 애처롭게 바라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생 확률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치료를 고집하는 가족들 앞에서 그는 철학자처럼 인간의 존엄을 되새긴다. “한 줌의 시간을 얻고 또 무엇을 잃는다. 반드시, 잃는다.”

 

〈밑바닥에서〉는 간호사의 민낯도 생생하게 보여준다. 병원의 위계질서에서 가장 밑바닥에 놓인 신참 간호사들은 환자에게 뺨을 얻어맞고도 사과조차 받지 못한다. 의사로부터 모멸감을 느낄 만큼의 성희롱을 당하고도 그냥 참는다. 이젠 ‘밈(meme)’이 되어버린, 표정 없고 기계적으로 친한 간호사들의 목소리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2018년 2월 15일 서울아산병원 박선욱 간호사가 입사 6개월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한민국 간호사들의 열악한 실태가 수면 위로 드러났다. 당시 김수련 간호사가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가 〈밑바닥에서〉 후반부에 실려 있다. 이 글은 ‘태움’이 구조적인 문제임을 소상히 밝히고 있어 눈길을 끈다.

 

OECD 평균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은 1인당 6-8명이다. 2016년 기준으로 미국은 간호사 1명이 5.3명을 보는 반면, 한국의 종합병원은 16.3명, 일반 병원은 43.6명을 담당한다. 담당 환자가 1명 증가할 때마다 환자의 사망률이 7%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환자와간호사의 비율은 상관관계가 뚜렷하다. 결국 역량 있는 간호사를 늘려야만 ‘태움’을 막고 환자의 생명권을 보호할 수 있는 셈이다.

 

코로나 팬데믹을 지나면서 공공의료 논의가 활발했다. 한국은 벼랑 끝에서 성공적인 방역을 이끌었지만, 공공성 확보라는 중차대한 과제를 떠안았다. 전체 병원의 95%가 사립인 상황에서 공공의료원 신설 움직임은 더디기만 하다. 병원은 엄청난 보조금 혜택을 누리면서도 필수 진료에 인색하다.

 

이 모든 부조리극은 국민 생명에 앞서 돈을 우선시하는의료시스템에서 비롯한 위기의 시그널이다. 〈밑바닥에서〉는 ‘태움’을 겨우 빠져나온 간호사가 정부와 의료계에 보내는 간곡한 호소문이다.


육성철(국가인권위원회 홍보협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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