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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2023.05~06] <세계인권선언>이 허락하지 않는 자유와 권리 -제30조-

 

<세계인권선언>이 허락하지 않는 자유와 권리

 

“이건 아니잖아? 대한민국에 사상의 자유가 있다며? 자중시켜야 하는 것 아냐? 대한민국에서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사람들이 저 사람들이잖아.”

 

 

지난 4월 3일, 제75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 나타난 서북청년단원이라는 자가 자신들을 가로막는 경찰을 붙잡고 한 말이다. 서북청년단에 앞서 서북청년회라는 게 있었다. 해방 직후, 친일 숙청과 토지개혁, 조선공산당 등을 피해 월남한 청년들로 조직된 극우 반공단체다. 당시 서북청년회는 이념 갈등으로 혼란스러웠던 해방공간에서 대공 투쟁을 위한 테러를 주도했다. 무고한 제주도민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도 그들이다. 서북청년단은 바로 그 서북청년회을 계승한다며 재건되었다. 서북청년회가 제주 도민을 학살한 지 60여 년이 지난 2014년이었다.

 

그해 서북청년회는 서울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 철거를 시도했다. 2023년 4월에는 4·3 희생자들 앞에 나타나 4·3을 ‘공산폭동’이라고 주장하는 현수막을 걸었다. 그리고는 ‘김일성 만세를 외칠 자유’를 운운하며 자신들의 생각과 행위를 사상의 자유와 표현할 권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김일성 만세를 외쳐도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바로 자유와 사랑의 시인으로 알려진 김수영이다.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에서

 

 

김수영은 4·19가 일어난 반년 뒤인 1960년 10월 6일 이 시를 탈고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이념적인 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했다. 민중들의 혁명으로 국민 주권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을 구현한 지 반년밖에 안 지났지만, 그 힘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사전허가와 검열제도를 금지하는 등 자유권을 강화한 헌법 제4호가 제정되었지만, 그때는 그랬다. 공산주의를 배제한 민주주의를 국조로 수립한 나라니 “김일성 만세”는 그 어떤 말보다 무시무시한 금기어일 수밖에 없었다. 이념 갈등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난 것도 겨우 10년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하지만 「김일성 만세」는 김수영 시인 작고 40주기를 맞는 2008년에서야 다른 미발표 원고와 함께 세상에 공개된다. 반공 이데올로기는 독재 정권 유지를 비롯한 통치의 수단으로 최근까지도 계속 활용되었기 때문이다.

 

 

김수영 말대로 당대 최고의 금기어를 입 밖에 낼 수 있다면, 그 사회는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사회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가 고도로 실현된 사회, 표현과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가 맞다. 학살자를 계승한다고 당당하게 나서고, 희생자 유족 앞에서 학살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오히려 자신들이 명예 훼손을 당했다고 큰소리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 대한민국 헌법과 <세계인권선언>도 보장하고 있는 바로 그 자유를. 하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세계인권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조항도 있다는 사실이다.

 

 

제30조
이 선언에 나와 있는 어떤 내용도 다음과 같이 해석해서는 안 된다. 즉, 어떤 국가, 집단 또는 개인이 이 선언에 나와 있는 그 어떤 권리와 자유라도 파괴하기 위한 활동에 가담할 권리가 있다고 암시하거나, 그러한 행동을 할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세계인권선언>이 허락하지 않는 자유와 권리

 

<세계인권선언>은 모든 자유와 권리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 선언문을 처음 읽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을 기억한다. 내가 조금만 더 순수했다면 피를 끓게 할 문장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무시당하고 침해당하는 일을 너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일까. 현실과 동떨어진 당위를 나열하고 있는 이 문장들이 나에게는 공허하고 힘없는 미사여구에 불과했다.

 

그런 <세계인권선언>에도 금지하고 제한하는 게 있다는 걸 이번에야 알았다. 비정치적인 범죄를 옹호하기 위한 권리 행사는 제한한다. 권리의 제한은 오로지 인권을 존중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 민주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무엇보다 선언문의 자유로운 해석을 제한한다. 바로 제30조가 말하는 바다. 우리 헌법에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은 조항이다.

 

<세계인권선언>을 마무리하는 이 조항 때문에 어떤 자유와 권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할 권리는 보장받을 수 없다. 이 선언문의 자의적인 해석을 제한함으로써 권리와 자유를 제한한다. 표현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권리와 자유를 파괴하기 위한 사상과 표현까지 보장되어야 한다고 해석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제주 4·3은 <세계인권선언>의 거의 모든 조항을 위반한 사건이다. 4·3 희생자와 그 유족들은 마땅히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와 자유를 철저히 짓밟혔다. 그것도 국가의 주도와 방관하에 이루어졌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이 참상의 진실을 밝히고, 무자비한 만행에 사죄를 요구하고, 무엇보다 유린당한 권리를 구제받을 권리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있다.

 

그러니 학살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은 틀렸다. 그들의 생각은 타인의 권리를 빼앗고, 자유를 침해하는 생각이다. 그러니 존중받을 권리가 아니고, 표현할 자유가 없다. <세계인권선언> 제30조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혐오 발언을 일삼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인권선언>은 그런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세계인권선언>을 다시 읽고 나서 깨닫는다. 이 선언문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약속이자 다짐이라는 것을. 학살이 일어났다고 해서 학살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법과 원칙이 남용된다고 해서, 세상이 그렇게 돌아간다고 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일어난 일일 뿐이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안타깝게도 일어나 버린 일이다.

 

중요한 것은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라는 마음이다. 모든 선언은 이 후회와 수치와 비통함에서 비롯된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난 후, 비록 우리는 실패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미래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선언문을 낳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만들어진 세계인권선언도 마찬가지다. 한두 명의 사적 개인이 아니라 한 종족이 다른 종족을 절멸하겠다는 생각으로, 국가라는 공적 제도를 이용하여 그 생각을 실행에 옮긴 끔찍한 만행에서 세계인권선언은 탄생했다. 아름답기는커녕 끔찍한 통한과 공허하기는커녕 처절한 결의가 이 선언문을 관통한다.

 

세계인권선언이 만들어진 지 75년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에서 비극이 일어난 지도 75년이 되었다. 세계인권선언을 만들기 위해 각국의 지성인들이 치열한 논의를 이어가던 그 순간에도 한반도의 작은 섬에서는 인권이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는 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타인의 권리와 자유의 파괴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 문장들을 가로채기까지 한다. 우리는 이 문장들을 지켜야 한다. 멋진 말들이어서가 아니라 이 선언문에 담긴 보다 나은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다.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허무에 맞서기 위해서다. <세계인권선언> 제30조는 이 문장들을 지키는 보루다.

 


글. 윤지영(시인, 동의대학교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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