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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돋보기 [2023.05~06]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 본 원고는 드라마 결말에 관한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사적 복수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들이 연일 화제다. 아주 최근만 해도, 학교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들에 대한 사적 복수에 나서는 <돼지의 왕>과 <더 글로리>가 인기를 끌었고, 복수 대행업체를 그린 <모범택시>는 시즌1의 흥행에 힘입어 시즌2가 나왔다. 복수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소재이니 새삼스러운 현상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유독 복수극을 자주 다룬다. 대중들의 열광도 특기할만한 수준인 것은 분명하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사람들은 왜 사적 복수에 열광할까? 가장 직관적이고 간단한 설명은, 공적 제재가 부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돼지의 왕>, <더 글로리>, <모범택시>에 등장하는 피해자들은 하나 같이 국가와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더 글로리>의 동은은 잔인하고 집요한 폭력을 당하지만, 학교, 경찰, 부모, 친구 그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 아니 심지어 방관하거나 동조하기까지 한다. 공적 시스템이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적 복수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실제로 복수극의 주인공들은 사적 복수라는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게 내몰린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복수극의 서사를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있을 법한 얘기’로 여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의 얘기 또는 나의 친구나 가족의 얘기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복수극에 열광하는 사회는 분명히 문제적이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사적 복수가 대안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사적 제재는 허용되지 않는다. 형사사법 시스템에 의한 공적 처벌이 사적 제재를 대신하고 있다. 피해자는 자신의 피해사실을 바탕으로 신고하거나 고소할 수 있지만, 수사기관이 수사를 시작하게 되는 순간 제3자가 되어 버린다. 수사는 경찰과 검찰이 하고, 기소는 검사가 맡는다. 검사는 공익을 대표하여 가해자를 처벌해달라고 공소를 제기하고, 독립기관인 법원이 이를 판단하여 유무죄를 가리게 된다. 형사재판의 양쪽에는 검사와 피고인이 서 있다. 피해자는 증인 역할을 하는 것을 제외하면 방청석에 앉아 재판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피해자는 이 절차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하지만 피해자를 제3자로 만든 것은 인류의 진보적 산물이다. 피해자로부터 복수의 권한을 빼앗은 것은 단순히 국가가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복수가 피해자의 손에 달려 있을 때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충분히 경험했다. 애시당초 피해자가 직접 수행하는 합리적인 복수라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누가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가려내고, 얼마나 잘못했는지 냉정하게 따져서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는 것은 당사자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당사자가 직접 나섰을 때 복수가 복수를 낳는 악순환이 반복되었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평화를 찾는 일은 더욱 요원하게 된다. <더 글로리>에서처럼 피해자들이 연대하여 복수를 감행하건, <모범택시>에서처럼 사적 업체가 복수를 대행해주건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드라마 <글로리>는 영리하게도 사적 복수의 이러한 위험성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문동은은 어설픈 용서와 화해 대신 확실한 복수를 택하지만, 그 방식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절제되어 있다. <돼지의 왕>의 피해자 황경민은 가해자들을 찾아서 차례로 살해하지만, <더 글로리>의 피해자 문동은의 복수 방법은 이보다 한결 정교하고 전략적이다. 문동은은 웃음기 한 번 제대로 보여주지 않으며, 복수극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분노와 격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의 복수는 냉정하고 치밀하고 전략적이다. 5명의 가해자들은 죽거나 감옥에 가거나 사회적 생명이 끝난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단순히 문동은에게 저지른 폭력에 대한 죗값만은 아니다. 문동은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이 그동안 저질렀던 여러 잘못 때문에 징벌을 받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들이 그동안 부당하게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빼앗기고, 위선으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파탄나면서 서로가 서로를 파괴하고 죽인다. 문동은은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장본인이지만, 가해자들을 직접 징벌하는 것은 그가 아니다. 경찰도 이 모든 것이 문동은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눈치채지만, 정작 문동은을 사법처리하지는 못한다. 문동은이 직접 복수행위를 한게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적 복수가 합리적이고 절제되었다고 해도 그것이 답일 수는 없다. 문동은은 자신의 인생을 바치고 모든 것을 걸고, 복수를 준비했어야 했다. 놀라운 절제력과 치밀함을 보여준다. 보통의 피해자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날 복수극의 인기는 국가적 시스템이 제 기능을 찾아야 한다는 대중들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열광을 넘어 대중들은 이미 현실에서 사적 복수를 감행하고 있다. 양육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아빠들을 고발하는 Bad Fathers, 성범죄자와 싸이코패스 신상공개를 하는 디지털교도소, 성폭력 피해자가 직접 대중들에게 고발하는 미투운동, 스포츠 선수나 연예인의 학폭에 대한 고발 등은 픽션이 아니라 우리가 발딛고 있는 현실이다.

 

일각에서는 한국이 범죄에 대해 ‘엄벌’에 처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지적하는 모양이다. 완전히 잘못된 얘기는 아니지만 좀 더 풍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엄벌한다는 것은 ‘확실히 처벌한다’는 의미와 ‘강하게 처벌한다’는 의미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전자는 잘못을 저지르면 예외 없이 모두 적발되어 처벌된다는 뜻이고, 후자는 가해자들에게 높은 수준의 형량을 부과한다는 뜻이다. <돼지의 왕>이나 <더 글로리>의 가해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처벌이 약해서 문제인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피해자가 가장 원하는 것은 피해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들이 가해자의 엄벌을 원하는 것은 피해 이전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함이다. 영화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사적 복수에 나서는 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하지만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만으로 피해자의 사회 복귀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피해자에 대한 심리적, 물질적 지원과 보호가 필요하고, 사회적 차원의 지지와 연대도 필요하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며 오랜 시간을 요하는 일이기도 하다. 사적 복수는 당사자가 직접할 수 있을지 몰라도, 피해자의 사회 복귀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공적 시스템이 작동해야 가능한 일이다. 피해자를 소외시켰던 근대 형사절차가 다시 피해자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보완책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복수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의 가장 큰 미덕은 피해자가 어떤 고통을 당했는지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정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누구나 공감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나 드라마같은 대중매체의 힘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분노의 에너지는 위력적이지만 지속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루 아침에 언제 그랬냐는 듯 유행이 끝날 지도 모른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이제는 우리가 응답해야 한다. 사적 복수에 대한 공감에 머물러서도 안되겠지만, 엄벌에 처해야 한다는 빈약한 교훈으로만 귀결되어서도 안되겠다. 부디 이 분노의 에너지가 허투루 쓰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사회

 


글. 홍성수(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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