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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톺아보기 [2024.03~04] 잊힐 수 없는 이야기, 참사의 기억을 마주하다

 

왼쪽부터 사회자 이태호, 박보나, 유정
왼쪽부터 사회자 이태호 (참여연대 운영위원장, 4·16연대 상임집행위원장, 10·29이태원참사 시민대책회의 공동운영위원장), 박보나(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성호 씨 누나), 유정(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연주 씨 언니)

 

세월호 참사 이후 10년이 지났음에도 재난과 참사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은 반복되고 있습니다.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의 시선도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슬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몸을 도로 위에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슬픔을 더 큰 변화로 이어 나가려는 유가족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성호 씨의 누나 박보나 씨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 유연주 씨의 언니 유정 씨를 만났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옳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결국 좋은 변화로 이어질 거라고요.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고 포용할 수 있다면, 응원과 연대의 힘으로 함께한다면 언젠가는 우리가 바라던 변화를 마주하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고요. 잊힐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마주한 채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들을 만나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사회자 참사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고통을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기에 쉽지 않은 결심이었을 텐데요. 인터뷰에 응하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박보나 한동안 일상을 지내면서 언론 앞에 유가족으로 서는 일이 힘들고 버거웠어요. 최근 이태원 참사 특별법 거부 상황이 세월호 1주기 때와 똑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암담하기도 했고요. 10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무력감과 우울을 느끼기도 했어요. 하지만 주저하거나 포기하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인터뷰에 응하게 됐어요.

 

유정 사람마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억압된 감정들을 털어낼 수 있는 것 같아서 가능하면 인터뷰나 간담회에 참석하고 있어요. 특히 오늘은 세월호 참사 희생자 박성호 님의 누나이신 보나 님의 참석 소식을 듣고 꼭 오고 싶었습니다. 형제자매끼리 통하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요.

 

 

Q. 참사 이후의 삶에 대해서 형제자매만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요.

 

박보나 앞으로 제가 살아갈 날들 속에 동생이 살아있었다면 생애주기별로 경험했을 일들이 있잖아요. 그때마다 동생이 떠올라요. 사람들은 언제까지 그리워하고 슬퍼해야 하냐고 묻지만, 상실의 경험은 사라지거나 완전히 극복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힘들고 무거운 감정도 마주 바라봐야 조금 더 가벼워질 수 있어요. 저에게 지난 10년은 상실의 고통을 무서워하고 겁내기보다는,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어요.

 

유정 유가족협의회 활동을 하다 보면 희생자인 언니나 누나, 동생의 생일이 다가와서 고통스러워하는 형제자매에게 감정 이입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제 1년이지만 사회적 참사로 유가족이 되신 모든 분들이 살아온 시간에 대해 깊이 공감하고 있어요.

 

 

Q. 세월호 참사는 단원고를 중심으로 활동과 연대를 이어왔어요. 이태원 참사와는 다른 구심점이 있었죠.

 

유정 씨

 

유정 이태원 참사 유가족에게는 시청 분향소가 유일하게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이에요. 분향소 지킴이를 하는 날에 서로 가끔 얼굴을 보거나, 가능한 날을 잡아서 전체 간담회를 열기도 해요. 하지만 인원이 많다 보니 SNS를 통해 일정을 맞추거나, 모일 공간을 마련하는 일도 쉽지는 않아요. 추모 시설이나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요.

 

박보나 많은 분이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게는 구심점이 되는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활동이 가능했다고 말해요. 유가족이 안전하게 모일 수 있는 오프라인 공간이 중요하다는 점에 저도 공감해요. 이태원 참사처럼 다양한 지역에 흩어져 있는 피해자들 간의 소통을 위해서는 온라인 공간의 활용도 중요해요. 해외 재난피해자 모임에서 알게 된 사례 중에는 모든 권리 정보를 웹사이트에 올려서, 필요한 사람이 원하는 때에 접근할 수 있도록 관리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어요. 공무원들이 하나하나 알려 주지 않아도 내 권리에 관한 정보를 온라인으로 쉽게 얻을 수 있는 거죠.

 

 

Q. 반대하는 사람들은 재난을 정치화하지 말라고 해요. 유가족이 권리와 진실을 찾자고 외치면 피해자다운 모습이 아니라고 하죠. 피해자이자 권리 주체로서 이런 사회적 반응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박보나 참사 이후에 사람들은 도보 행진이나 피켓 시위하는 유가족들을 비난했어요. 그들이 생각하는 피해자다운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일이니까요.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비난 앞에서 위축되고 조심스러워졌어요. 이상한 유가족이라며 비난하는 말을 계속해서 듣다보면 어느 순간 피해자도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요. 하지만 참사 수습과 진상규명을 위해 가족들은 계속해서 거리로 나갈 수 밖에 없었어요. 무엇이 권리라는 명확한 인식이 있었다기보다는, 가만히 있을 수 없기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거죠. 사건 이후 인권운동가나 다른 참사 피해자들을 만나면서 우리에게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중략) 결코 '떼쓰는 유가족'이 아님을 알았죠. 피해자 스스로 주눅들지 않고 계속 말해야 한다는 다짐을 놓지 않게 됐어요.

 

유정 연주는 참사 발생 이후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경찰의 부검 요구를 비롯해서 장례를 치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었죠.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가족이 죽은 이유를 알 권리, 장례를 언제 치를 건지 결정할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거예요. 참사 피해자나 유가족으로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알지 못했죠.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시선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 있어요. 밝은 색상의 옷을 입고 화장한 얼굴로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그들이 요구하는 유가족의 틀을 벗어나는 거죠. 제가 활동을 계속하는 건 연주와 참사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기도 하지만, 이런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고 싶다는 목표도 있기 때문이에요.

 

 

Q. 참사 이후 2차 가해로 인한 트라우마도 있을 텐데요. 어떻게 견디고 있나요.

 

유정 솔직히 처음에는 연대의 힘보다는 2차 가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컸어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많이 울었고, 대인기피증도 생겼어요. 그러다 참사 1주기를 맞았죠. 저희는 가족인 피해자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단식이나 삭발도 하고 오체투지도 할 수 있지만, 시민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런데도 저희와 함께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이들처럼 지난 사회적 참사에 내 일처럼 아파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컸어요.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으니 더 이상 댓글에 상처받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죠.

 

박보나 10년이 지났어도 바다나 배, 기울어진 이미지를 보면 여전히 힘들어요. 사람들의 비난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가끔 옅어지지만, 다시 짙어지기도 하고요. 그래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함께 기억하고 포옹하려 노력하는 것이 많은 도움이 돼요.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도 각자 자기 안에 있는 고통이나 상처를 바라보고 수용하는 경험이 필요해요. 자기 자신의 상처도 마주하지 못하는데 상대의 상처를 알아주기는 힘드니까요. 우선은 그런 노력을 시작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야죠.

 

 

Q. 결국 사람이 사람과 함께하는 연대가 힘을 주는 것 같아요

 

유정 제일 큰 힘이 되는 건 행진 대열의 끝이 안보일 정도로 많은 시민들이 함께해 주실 때에요. 참사 초기에 녹사평 분향소가 있을 때는 맞은편에서 쏟아지는 2차 가해의 말들 때문에 분향소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어요. 말 그대로 지옥이었죠. 하지만 시청으로 분향소를 옮기고 난 뒤에는 힘내라고 말해주시는 시민 분들 덕분에 기운을 얻었어요. 마주 보고, 손을 잡고,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를 건네는 것이 듣는 사람에게는 큰 힘을 줘요. 많은 사람들과 진심을 나누면서 하루하루 버틸 힘을 얻었어요.

 

박보나 씨

 

박보나 단식에 동참하거나, 폭우 속에서도 끝까지 추모제를 지켜주셨던 분들처럼 타인과 연결됐던 기억이 많은 힘이 됐어요. 누군가 계속해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도 큰 위안이 돼요. 세월호 생존 학생과 형제자매들을 인터뷰한 <다시 봄이 올 거예요>라는 책이 도서관이나 학교에서 꾸준히 읽힌다고 하더라고요. 힘든 감정도 마주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희망을 얻어요.

 

 

Q. 세월호 이후 참사가 개인에게 닥친 불행이 아닌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이 생겼어요.

 

박보나 세월호 참사로 재난 참사와 관련한 특별법이 최초로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피해에 대해, 왜 지원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특별법을 음해하고 저지하려는 반대 활동도 많았어요. 이번에도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반대하는 국민 청원이나, 왜 우리 세금으로 피해자를 지원해야 하냐, 왜 저들이 특혜를 받아야 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달라진 것이 없다고 느꼈어요.

피해자가 나서서 특별법을 제정해 달라고 주장하고, 국가는 거기에 맞서 반대하는 상황이 이상한 거예요. 법안을 발의하고, 국민을 설득하고, 법에 따라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국가의 일이지 유가족이나 피해자가 할 일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국가는 피해자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시혜적인 입장에서만 접근하면서 본연의 책무를 다하지 않고 있어요.

특별법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라는 채로, 피하고 묻어두고 싶어 해요. 하지만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이 아니더라도 죽음을 비롯한 상실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어요. 저는 그런 상실의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연결될 수 있다고 믿어요. 자신의 상처를 마주 보고, 서로의 상처를 돌봐주면서 경험을 공유해야 해요. 국가가 하지 못하면 시민들의 자발적인 노력으로라도 서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요.

 

 

잊힐 수 없는 이야기, 참사의 기억을 마주하다

 

Q. 최근 정부가 이태원 참사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어요. 국가가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낯설고 적대적으로 대한다고 느껴집니다.

 

박보나 박근혜 대통령 탄핵 당시에도 참사에 대한 책임은 인정되지 않았죠. 국가가 국민을 안전하게 보장할 책무가 있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것 같아서 답답했어요. 홀로코스트 피해자들을 만나러 간 독일에서 한 가이드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요. 한 번 일어난 참사는 언제든 반복될 수 있기에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에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그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가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고 같은 참사를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예방 매뉴얼과 시스템이 없는 것 같아서 답답해요. 세월호 선체 조사 당시에 네덜란드에서 오신 분들이 이런 연구를 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어요. 다른 선박을 만들거나 운행할 때 안전을 위해 참고할 수 있으니까요. 2019년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다시 여객선이 침몰하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나 참사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여러 나라가 함께 예방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어요. 나라마다 실정은 다르지만, 공통으로 적용할 수 있는 예방 수칙이나 매뉴얼이 있을 거고, 과거 사건을 통해서 얻은 예방책도 적용할 수 있겠죠.

 

유정 저는 길 가다가 넘어지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라, 스스로 삼보일배나 오체투지로 아스팔트 위에 온몸을 던지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는데요. 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쯤은 아무 일도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특별법에 대한 거부권이 행사되고 나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현실이 너무 힘들었어요. 사실 참사의 발생은 예측할 수가 없잖아요. 자연재해든 사회적 참사든 예방할 수는 있지만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요. 그렇다면 참사 이후, 수습하는 과정이라도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전혀 변화한 것이 없어요. 저녁을 먹고 오겠다고 나갔던 동생이 돌아오지 못했는데, 참사 이후에 어떤 경로로 동생이 병원에 이송되고, 구급 조치를 받았는지, 어디에서 발견되었는지조차 저희는 알지 못해요. 그날 동생을 구조한 구급대원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여러 번 요청했지만, 저희가 받은 것은 1장짜리 구급활동일지가 전부였어요. 구급대원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이야기는 들을 수 없었죠. 하지만 저희가 연주의 가족으로서 그날의 일을 모르고 지나갈 수는 없어요. 그래서 다시 특별법 제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잊힐 수 없는 이야기, 참사의 기억을 마주하다

 

Q. 세월호 당시 참사에 대한 국가의 접근은 시혜적인 수준에 그쳤지만, 많은 국민들은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데 함께 목소리를 높였어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독립적인 재난조사 기구를 상설화하도록 권고하기도 했고요. 국가는 아직 변화에 저항하고 있지만, 분명히 세상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박보나 이태원 참사나 세월호 이후의 참사들을 보고 죄책감과 미안함을 많이 느꼈어요. 하지만 우리끼리만 미안해해서는 안 돼요. 미안해하고 사과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함께 잘 살아내고 견뎌내면 좋겠어요. 참사와 관련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특별법이 만들어졌지만, 세상이 전부 변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옳지 않은 행동이 무엇인지 판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다시 좋은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해요. 저도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시민 분들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유정 저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 유가족 분들에게 죄송함을 느꼈어요. 세월호 참사 당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데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동이 분향소에 가고 리본을 다는 것뿐이었어요. 아무리 학생이었지만 조금 더 적극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후회가 많이 됐어요. 그때의 내 행동 때문에 동생이 참사를 당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서 지금 유가족이 아님에도 함께 연대해 주시는 분들에게 너무 감사해요. 앞으로 밝혀져야 할 진실이 많기에 절대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연대해서 싸워 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잊힐 수 없는 이야기, 참사의 기억을 마주하다

 

진행 | 인권 편집부
사진 | 전재천 포토그래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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