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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는 시간 [2024.03~04] 진정한 고해성사 그리고 용서 <두 교황>

 

종종 삶이 불만족스러울 때 <두 교황>을 떠올린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무언가를 찾아 움직일 때가 되었다는 뜻이다. 변화를 도모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진정한 고해성사 그리고 용서 <두 교황>

 

왼쪽에서 보는 것과 오른쪽에서 보는 것

 

2022년 12월31일 눈을 감은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그의 뒤를 이은 현 교황 프란치스코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영화 <두 교황>에선 반복해서 스마트워치의 알람이 두 교황을 움직이게 만든다. “멈추지 마세요. 계속 움직이세요.” 우리의 건강까지 책임지고 있는 스마트폰의 친절한 기계 음성은 쉽고 간결한 문장으로 우리의 무거운 몸과 침체된 마음을 일으켜 세운다. 건강하려면 움직여야 한다는 단순한 명제만큼, 인간도 교회도 세상도 가만히 멈춰 있어선 안 된다는 게 이 영화의 메시지인 것은 분명하다. 오늘 하루 우리가 얼마나 걸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신체의 이동과 장소의 이동은 시선의 이동을 동반한다. 위에서 보는 것과 아래에서 보는 것은 다르다. 앞에서 보는 것과 뒤에서 보는 것, 왼쪽에서 보는 것과 오른쪽에서 보는 것도 다르다. 우리는 가능한 다양한 곳으로 이동해 다양한 시야각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시야와 사고는 그렇게 확장되기 때문이다.

 

 

실화에 근거한 픽션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서거하면서 새 교황을 선출하기 위한 추기경단의 선거회, 콘클라베가 진행된다. 전통을 중요시하는 보수 진영의 대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안소니 홉킨스)이 몇 번의 재투표 속에 새 교황으로 선출돼 베네딕토 16세라는 이름으로 가톨릭 교회의 수장이 된다. 경쟁자 중 한명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의 대주교이자 진보적 인물인 호르헤 베르골리오 추기경(조나단 프라이스, 이후 현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인물)이다. 영화는 2005년의 베네딕토 16세 교황 선출과 2013년의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까지의 시기를 다루며, 그 과정에서 대비되는 성격과 사상을 지닌 ‘두 교황’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준다. 참고로 이것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가 보여주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창조적 모사가 이들을 실제 교황으로 오해하기 만들기 충분하지만, 바티칸의 시스티나 성당과 교황청 소유 여름 별장 카스텔 간돌포를 완벽하게 재현한 프로덕션 또한 <두 교황>을 다큐멘터리로 오해하게 만들고도 남지만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실화에 근거한 픽션이다.

 

진정한 고해성사 그리고 용서 <두 교황>

 

극영화로서 <두 교황>은 의도적으로 두 인물의 차이에 집중한다. 두 인물의 대비는 갈등을 부각하기 위한 효과로 쓰이지 않는다. 오히려 신뢰, 우정, 소통, 화합, 용서, 사랑과 같은 이야기를 위해 아름답게 쓰인다. 우리는 다르지만,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더 큰 가능성의 길이 열린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러한 스토리텔링은 특별하다. 우선 독일 출신의 베네딕토 16세는 비틀즈의 ‘애비 로드’와 아바의 ‘댄싱 퀸’은 모르지만 수많은 언어에 능통한 지적이고 신념이 강한 학자 스타일의 보수적 교황이다. 피아노 연주에 능하고 혼자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며 사교보다는 사색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반면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는 축구와 탱고를 좋아한다. 그에게 격식과 권위는 중요한 것이 아니며 검박한 생활이 몸에 배어 있고 친화력이 좋다. 교황청의 별장 카스텔 간돌포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누던 때의 장면이다. “교회가 실패했다고 보시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어요.” “그게 교회의 잘못이오?” “교황님의 교회가, 아니 우리 교회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또는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죠. 시대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는데도 말이죠.” 독일과 아르헨티나, 유럽과 남미의 거리만큼이나 두 사람의 생각차는 크다. 두 사람은 각각 보수와 진보, 전통과 개혁을 상징한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깊은 대화를 나누게 된 이유는 그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물러날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고해성사 그리고 용서 <두 교황>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자신의 사임을 청하기 위해 무수히 바티칸에 편지를 보냈음에도 답장을 받지 못했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2012년의 어느날 바티칸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는다. 당시 교황청은 성추문과 파벌주의, 교황의 비서가 저지른 비리와 기밀문서 유출 등으로 큰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다. 가톨릭의 수호자이자 인권의 수호자로서 이 모든 비리 앞에 떳떳할 수 없는 교황은 자신이 줄기차게 외면해왔던 추기경의 사임 요청을 이번에도 줄기차게 외면하면서 도리어 그에게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교황의 자리에서 물러나겠소. 당신이 적임자인 것 같소.” 정의와 진실의 순교자인 교황은 종신직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날 선 언어로 비판했던 사람에게 사임의 뜻을 밝히곤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어떻게 내 잘못을 바로 잡는지 보고싶소. 나는 당신의 여러 생각들에 동의하지 않지만, 왜 당신이 필요한지 이해할 것 같소. 당신이 그 변화일 수 있다고 생각하오.”

 

영화는 끝까지 ‘두 교황’에 대한 이야기로 균형감 있게 무게 추를 맞추지만 이 순간만큼은 베네딕토 16세의 존재가 환하게 영화를 장악한다.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바티칸의 추문을 들추는 것만큼이나 진정한 고해성사와 용서는 중요한 법이다. <두 교황>은 전자가 아닌 후자에 집중하는 영화다.

 

진정한 고해성사 그리고 용서 <두 교황>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영화에는 두 교황의 고해성사가 나온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이 교황이 될 수 없는 이유로 과거 아르헨티나 군사독재 시절 자신이 보호하지 못한 사제들에 대한 죄를 고백한다. 이후 그는 속죄의 길을 걸었다. 그는 타협했고, 변했다. ‘변화’냐 ‘타협’이냐를 놓고 가볍게 언쟁하는 두 교황의 모습에서 무엇이 맞고 틀렸다 결론을 도출하는 것은 의미 없다. 우리는 모두 흔들리는 존재이고 실수하는 존재이고 타협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변화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신이 아닌 인간이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이다. 그러니 우리는 변할 수 있다. 더 나은 변화를 꿈꿀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즉위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교회는, 세상은 얼마나 변했을까.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이고 갈등은 넘쳐난다. 그럼에도 지난해 교황청은 동성 커플을 공식적으로 축복함으로써 담을 쌓고 선을 긋는 종교가 아니라 열린 종교로서의 행보를 보여주었다. 반갑게도 올해 초 한국에서도 동성 커플을 위한 가톨릭 사제의 축복 기도가 있었다. 이 세상은 조금이라도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글쎄, 모르겠다. 변화를 원한다면 움직여야 한다는 것밖에는. 그저 오늘도 걸음을 옮기는 수밖에는.

 

 

글쓴이 이주현은 전<씨네21> 기자이자 편집장이다. 인권 영화 도서 「총은 총을 부르고 꽃은 꽃을 부르고.」를 썼다.

 

글 | 이주현(전 씨네21 편집장)

사진 |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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