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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참정권의 의미를 생각한다

인권이 자란다 [2020.03] 말하고 들리는 존재가 되기를 원한다
청소년 참정권의 의미를 생각한다

글 배경내 상임활동가(인권교육센터 들)

 

2018년 6월, 지방선거 사전투표일. 청와대 인근에서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시민들이 교복을 입고 투표소에 입장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선거권 연령 하향에 반대하는 정당과 여론에 응답하기 위해 기획된 퍼포먼스였다. 청소년과 함께 투표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냄과 동시에 청소년은 정치하면 안 된다는 오랜 사회적 금기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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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유령에서 시민이 되고자 하는 자

‘투표소 교복 입장’ 퍼포먼스를 하며 우리가 투표소에 입장하는 동안 선거권 연령 하향 운동을 함께 해온 청소년들은 바깥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내가 당연한 듯 누리는 이 선거권이 ‘인권’이 아니라 ‘특권’이었다는 걸 절감한 순간이었다. 불편한 교복 하나 바꾸기 힘든 현실은 인구 5분의 1에 달하는 만 18세 이하 청소년이 시민의 자리에서 추방되어 있는 조건이 빚어낸 결과구나 싶었다.
“우리가, 우리가 해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2019년 12월의 마지막 날. 국회 앞에서는 선거권 연령을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낮추는 공직선거법 개정안의 통과를 자축하는 행사가 열렸다. 존엄과 인권의 상징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의 상징이기도 했던 장미를 청소년들에게 선물하고 우리는 부둥켜안으며 환호했다. 그렇게 만 18세 선거권 시대가, 청소년을 시민으로서 사회가 인정하는 시대가 마침내 찾아왔다.
한국사회에서 선거권을 비롯해 청소년 참정권을 보장하라는 목소리는 3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청소년 참정권 운동이 주로 선거권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 이유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청소년들은 중요한 역사의 변곡점마다 정치에 활발히 참여했지만 정작 눈앞에 다가온 선거에서는 배제되는 부정의를 연거푸 겪어왔다. ‘박근혜 탄핵 촛불’ 광장의 주역이었던 청소년들은 2017년 대통령선거에서는 투표소 바깥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청소년 참정권 운동을 다시 본격화해야 한다는 다짐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18세 선거권 시대’를 앞당길 수 있었다.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은 단지 투표소에 입장할 권리만을 뜻하지 않는다. 참정권은 자기가 속한 정치공동체의 의사 형성에 참여하고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주권’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실제 삶으로 옮겨와 그 존재를 드러내고 행사하는 것이 바로 정치 참여다. 그래서 참정권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국가로부터는 실질적 주권자로, 사회로부터는 동등한 동료 시민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반대로 참정권이 없다는 것은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입장할 권리도, 대표될 이유도, 목소리를 낼 권리도 없는 집단에 속한다는 뜻이다. 정치인들 입장에서 보자면 선거권조차 없는 청소년은 고려의 대상도 되지 않는 사회적 ‘유령’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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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

역사적으로 참정권이 모든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에게 보편적으로 보장된 적은 없었다. 근대시민혁명 이후 참정권은 일정 이상의 재산을 가진 이들이나 남성, 혹은 백인만이 전유하던 ‘특권’으로 출발했다. 인권과 민주주의의 역사는 일부의 특권이었던 참정권을 누구나 갖는 ‘생래적 권리’로 전환시켜 온 역사였다. 신분, 재산, 성별, 인종, 장애와 같은 장벽들이 차례로 허물어졌다. 참정권의 내용도 확대됐다. ‘국회의원을 뽑을 동안만 잠시 자유로울 뿐, 선거가 끝나자마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돌아간다’는 장 자크 루소의 지적처럼, 대의제 민주주의가 갖는 한계를 넘기 위해 국민발안(발의)권, 국민소환권, 국민투표권과 같은 직접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되고 정치표현의 자유나 정당 활동의 자유와 같은 일상적 참정권이 확대됐다. 그런데 한국에서 청소년은 참정권은커녕 학교운영위원회에 참여할 권리조차 없다. 대다수 국가가 참정권과 관련하여 연령의 장벽을 부분적으로 유지하고 있지만, 한국처럼 모든 영역에서 청소년의 참정권을 전면 배제해온 경우는 보기 힘들다. 청소년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의 참정권 제도는 ‘연령 신분제’나 다름없다. 그래서 청소년에게 참정권은 동등한 시민의 위치를 얻겠다는 선언이다.
그들에게 참정권은 ‘말하고 들리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시민의 자리에서 밀려난 이들이 다른 곳에서 제 대접을 받을 리 있을까. 학교는 일을 시킬 때만 학생을 학교의 주인이라 부를 뿐, 학생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는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운동이나 ‘스쿨 미투’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이나 혐오 발언에 대해 학생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바로잡기란 쉽지 않다. 가정이나 쉼터 같은 소위 ‘보호’를 위한 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학대는 청소년의 삶에서 보면 강력범죄나 다름없는 수준이지만, 대책은 굼뜨다. 청소년의 인권을 위한 예산도 턱없이 부족하다.
말하지 못했고, 말했으나 들리지 못한 경험 속에서 청소년들은 참정권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기후위기 문제를 방치하는 정부의 책임을 묻고 싶었던 청소년은 “참정권이 없기에 청소년의 목소리에 무관심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부당한 학교교칙을 바꾸기 위해 고군분투했고 청소년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 정치를 바꾸고 싶었던 청소년은 “나는 분명 존재했지만 아무도 봐주지 않았고 목소리를 냈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고 외쳤다. 학생인권조례를 만들려다 결국 비청소년(성인)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을 가진 청소년은 “같은 목소리로, 같은 크기로 인정받고 싶다”고 전했다. 스쿨 미투 운동에 참여했던 청소년은 “구시대적이고 차별적인 사회의 대우를 주체적으로 바꿔낼 힘이 필요하다”고 다짐했다. 부모의 학대를 피해 탈가정한 청소년은 “청소년과 보호자의 권력 차이가 폭력을 낳고 은폐하도록 만든다. 그 권력 차이를 줄이기 위해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결국 청소년에게 참정권은 깨끗한 정치를 표상하는 장식이 아니라, 변화를 일구는 힘을 가진 주체가 되고 싶다는 열망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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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선거권으로 충분하다?

18세 선거권으로 그동안 청소년 출입금지구역이었던 선거와 정치 참여의 길이 열림으로써 한국 민주주의는 중대한 진전을 일구었다. 그러나 이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18세 이하 청소년 중 극소수에게만 참정권이 보장되었을 뿐, 청소년의 참정권 전반은 여전히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있다. 이미 60~70년대에 18세 선거권을 도입했던 나라에서는 16세로 선거권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목소리를 ‘대표할 권리’인 피선거권 연령은 1948년 만25세로 정한 이래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선거권을 제대로 행사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와 의사 교환도 가로막혀 있다. 18세 미만 청소년은 선거운동 기간에 후보에 대한 지지나 반대 의견조차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가깝게는 학교운영위원회 구성에서조차 학생 대표는 없다. 학교 안에서 학생은 여전히 ‘시민’이 아닌 셈이다.
‘청소년은 정치적 판단력이 부족하다’, ‘청소년에게 정치는 해롭다’, ‘정치보다는 공부가 우선이다’와 같은 인식도 여전히 널리 퍼져있다. ‘교육의 정치화’ 논란이 그 방증이다. 청소년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는 학칙도 여전하고 얼마 전 선거관리위원회는 모의선거교육까지 금지하는 후퇴 결정을 내놓기도 했다. “우리들이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이 막아서 그런 것이고, 우리들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이 가르치지 않아서 그런 것이고, 우리들이 고통 받는 이유는 우리들의 정치를 하지 못해서다.” 지난해 12월초, 선거권 연령하향을 촉구하는 국회 앞 행사에 참가한 한 중학생의 발언은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바를 잘 보여준다. ‘몇 살부터 가능하냐’고 묻기보다 ‘어떻게 하면 참정권을 더욱 확대하고 참정권 행사를 지원할 수 있는가’로 접근을 전환할 때, 특정 연령집단을 배제한 특권으로서의 참정권이 인권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

 

 

배경내 상임활동가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에서 공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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